[책의 향기]설원 가르듯 스릴 넘치는 추리극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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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러시/히가시노 게이고 지음·민경욱 옮김/348쪽·1만6800원·소미미디어

일본 다이호대 의과학연구소로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메일 속 사진엔 곰 인형과 스키 리프트뿐…. 범인은 사진 속 배경인 스키장에 생화학무기를 숨겨 놨다. 주인공 구리바야시는 이 사진 한 장을 단서로 전국 수백 개의 스키장 중 한 곳에 묻힌 무기의 행방을 알아내야 한다.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 무기를 찾지 못한 채 날이 따뜻해지면 탄저균이 공기 중에 퍼져 온 마을이 초토화된다. 설산에서의 ‘화이트 러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학창 시절부터 스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저자는 총 4권으로 구성된 ‘설산 시리즈’를 펴냈다. 그중 ‘화이트 러시’는 ‘백은의 잭’을 잇는 두 번째 작품이다. 2013년 현지에서 출간된 지 일주일 만에 100만 부 넘게 팔리며 인기를 모았다. 시리즈는 작중 등장인물인 구조요원 네즈와 스노보드 선수 지아키를 공통분모로 ‘눈보라 체이스’, ‘연애의 행방’으로 이어진다.

추리물로서 ‘화이트 러시’는 저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용의자 X의 헌신’, ‘가면산장 살인사건’ 등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크다. 치밀한 추론 과정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개인의 양심과 보신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며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결말의 완성도 역시 떨어지는 편이다. 감동을 기대한 듯한 반전은 앞서 쌓아올린 서사와 이질감을 빚어 다소 생뚱맞기까지 하다.

다만 설원을 가르듯 속도감 있는 전개가 주는 스릴은 확실하다. 이야기 곳곳에 불필요한 미끼를 심어두는 대신 생화학무기가 파묻힌 곳을 향해 모두가 달려 나가는 명쾌한 서사로 해방감을 선사한다. 작가 특유의 간단명료한 문장과 백색 비탈길에서 벌어지는 추격 장면은 속도감을 배가한다.

스키어들의 눈에 담길 아름다운 설경을 묘사한 문장들도 감상의 묘미다. ‘온통 은빛 세상’에 둘러싸인 구리바야시는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스키장을 활보한다. 높다랗게 자란 너도밤나무 사이로 보드라운 파우더 스노가 흩날리는 대목은 당장이라도 눈밭을 거닐고 싶게 만든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추리극#화이트 러시#설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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