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재동]빚 무서운 줄 모르다가는 패가망신하는 시대가 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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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차장
유재동 경제부 차장
이달 초 KB금융이 출간한 보고서에는 ‘역시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절로 들게 하는 부분이 나온다. 금융자산만 10억 원이 넘는 자산가들의 특징을 분석해 봤더니 이들은 코로나 사태 때 새로운 자산에 적극 투자하기보다는 빚을 먼저 줄이는 전략을 썼다고 한다. 흔히들 빚을 지렛대 삼아 자산을 불려 나가는 것을 ‘투자의 정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와 반대로 부자들은 60% 이상이 ‘부채는 자산이 아니다’라면서 빚내는 것에 거리를 뒀다. 심층면접에 응한 자산가들은 “꼭 필요하면 대출을 받더라도 현금이 생기면 빚을 우선적으로 갚는 데 주력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청년, 서민들의 대응은 부자들의 이런 태도와 많이 달랐다. 코로나 이후 저금리가 길어지고 유동성으로 자산가격이 폭등하자 20, 30대 투자자들은 자기 돈, 남의 돈을 가리지 않고 끌어모아 주식과 부동산을 사들였다. 외환위기 때 20%를 넘나드는 고금리를 경험한 장·노년층과 달리 대출의 무서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과감한 투자에 나선 것이다. 무모한 ‘빚투’의 청구서는 지금 10%에 육박하는 대출 이자로 돌아오고 있다. 올겨울이 이들에게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 상황만 보면 마치 고금리 시대가 어느 날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왔고, 이를 예견한 부자들이 빚을 미리 줄여 나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금리가 빠르게 오를 것이라는 경고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에서는 이미 작년 봄부터 인플레이션을 차단하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아마존 테슬라 등 빅테크 기업 주가와 가상화폐 가격이 폭등하면서 각국 투자자들이 ‘유동성 파티’를 벌일 때였다. 그즈음 한국에서도 물가가 들썩이는 신호가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 한국은행 총재 역시 일찌감치 투자자들의 ‘빚투’ 열풍에 우려의 메시지를 냈다. 지금 ‘영끌족’의 고통은 이런 경제 흐름을 읽지 못하고 분에 넘치는 위험을 짊어진 대가라는 지적도 무리가 아니다.

빚의 복수극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년부터 더 본격화된다. 연준이 금리를 올릴 만큼 올린 것 같지만 아직도 최소 1%포인트는 추가로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다. 연 5%에 이르는 금리 수준이 미국에서 한동안 이어지면 전 세계에 충격파가 확산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 기간 민간부문 부채 증가폭이 주요국 중 최상위권이었던 한국은 더 심각하다. 올해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는 시중은행들은 내년엔 대규모 대출 부실에 대비해 상당한 충당금을 쌓아놨다고 한다. 이자 폭탄을 더는 못 버티고 쓰러지는 가계, 기업이 마구 쏟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정부도 영끌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기업의 흑자도산을 막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누가 대신 해주겠거니’ 바라면서 팔짱만 끼고 있으면 안 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제로금리와 저성장에 적응하려 노력해 왔듯이 각자가 고금리·고인플레 시대에 맞는 생존법을 익혀야 한다. 시대가 어떻게 바뀌든 항상 분명한 것은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점이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빚#고금리 시대#패가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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