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수첩에 담긴 피카소 연인의 비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8일 10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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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수첩의 비밀 / 브리지트 벤케문 지음·윤진 옮김 / 364쪽·1만7000원·복복서가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그와 공식적인 연인관계였던 여성만 7명. 그 중 유명한 이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9년 간 피카소와 함께 했던 도라 마르다. 연인의 초상화도 다수 그렸던 피카소는 마르를 뮤즈 삼아 ‘우는 여인’(1937년)이라는 유명한 작품도 남겼다. 마르는 당시 패션과 광고사진으로 이름을 알린 사진작가였고, 다양한 그림을 남긴 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작가’보단 ‘피카소의 연인’으로 더 유명해졌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에르메스 수첩의 비밀’(복복서가)에서 열정과 광기, 공허함으로 점철됐던 마르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재조명한다. 저자가 마르의 발자취를 추적하게 된 계기는 한 권의 다이어리였다. 남편이 아끼던 에르메스 다이어리를 잃어버린 저자는 이와 가장 비슷한 제품을 이베이에서 주문했다. 배송된 다이어리 안주머니에 샤갈, 라캉, 자코메티 등 예술가들의 주소록 수첩이 끼워져 있었던 것. 이 수첩이 마르의 것임을 확신한 저자는 2년 동안 수첩에 적힌 이름과 관련된 자료, 기사를 뒤졌고 생존 인물을 직접 찾아다녔다.

책은 마르가 누군가의 뮤즈가 아닌 예술가로 인정받고자 노력한 과정을 따라간다. 마르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스페인과 영국의 가난한 동네를 다니며 실업자, 기형의 몸을 가진 사람 등 사회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로 평가받는 그의 대표작 ‘무제’(1933년)는 거대한 소라에서 매니큐어를 칠한 손이 뻗어 나오는 모습을 담았다. 몽환적이고 기이한 마르의 몽타주 작품들 역시 실험성과 참신함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예술가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사랑을 갈구했던 한 여자로서의 삶도 그려진다. 피카소를 비롯한 연인들과의 관계에서 마르는 늘 감정에 솔직했고 적극적이었다. 때때로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은 광기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가 피카소와 만나기 전 연애했던 프랑스 시나리오 작가 루이 샤방스가 마르에 대해 남긴 시는 불같은 마르의 성격을 추측케 한다. ‘그대 이제 흔들리는구나. 신경질 가득한 미친 여인…내가 바친 사랑의 대가로 내 배를 걷어찼지.’

처음 피카소와 만난 카페 되 마고에서 마르는 피카소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손가락 사이로 칼을 내리 꽂았고, 마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피카소는 그를 카페에 데려온 시인 폴 엘뤼아르에게 이렇게 묻는다. “저 이상한 여자를 압니까?”

유명 예술가의 삶에는 늘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가 존재했다. 근대조각의 시조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아내였던 에밀리 플뢰게가 대표적이다. 끌로델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뮤즈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조각에 천재적 재능을 드러냈던 조각가였다. 플뢰게 역시 바람둥이 클림트가 유일하게 평생 사랑했던 여성으로 유명할 뿐, 오스트리아 유명 패션디자이너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의 삶은 누군가의 뮤즈이기 이전에 한 명의 예술가로서 창작에 혼신을 다하고 사랑에 늘 솔직했던 한 주체적인 여성이 있음을 몸소 증명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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