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역사는 민족의 정신’ 외치며 임정 추스른 백암 별세

이진기자 입력 2021-09-10 11:40수정 2021-09-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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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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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호외가 중국 상하이 거리에 뿌려졌습니다. 1925년 11월 2일이었죠. 전 임시대통령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겨 망명한 뒤 14년 동안 이역의 하늘 밑을 서성이다 향년 67세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유해는 고향 땅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으로 모셨지만 상하이의 공동묘지에 임시 유택을 마련했죠. 그로부터 68년이나 지난 1993년이 되어서야 유해가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백암 박은식 이야기입니다. 이미 늙은 몸인데다 천식으로 건강까지 좋지 않았지만 무너져가는 임시정부를 추스르기 위해 임시대통령 자리를 떠맡은 ‘선공후사’의 어른이었습니다.

왼쪽은 전 임시대통령 박은식 각하의 서거 소식을 전한 1925년 11월 2일자 독립신문 호외. 오른쪽은 백암 박은식의 얼굴사진


무엇보다 박은식은 역사가였습니다. ‘국체는 비록 망했으나 국혼이 불멸하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국사책마저 불살라 없어졌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망명하면서 남긴 말입니다. 서간도로 간 뒤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발해태조건국지 등을 불과 7개월 만에 정력적으로 써냈죠. 그의 역사관은 ‘대동사상’이었습니다. 만주도 우리 국토이며 금나라, 청나라도 같은 민족이라고 봤습니다. ‘역사가 없으면 민족도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민족의 정신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죠. 1915년 펴낸 ‘한국통사’는 우리의 눈물, 1920년 써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피였습니다. 두 책은 독립운동의 무기였죠. 이를 겁내서였을까요? 일제는 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자 추모 사설 ‘哭(곡) 白庵(백암) 朴夫子(박부자)’를 삭제하면서까지 그의 삶이 알려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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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자 1면에 박은식의 서거를 추모하는 사설 ‘哭(곡) 白庵(백암) 朴夫子(박부자)‘를 실었으나 일제 총독부에 의해 삭제당했다. 이 사설에서 동아일보는 유학자 박은식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중국 밖의 공자를 뜻하는 ‘朴夫子(박부자)‘로 높여 불렀다.


그는 언론인이기도 했습니다. 46세이던 1905년 대한매일신보 주필이 되어 필봉을 휘둘렀습니다.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두려워하여 한성 밖으로는 배포를 막고 박은식을 사령부로 잡아가기까지 했다고 황현의 매천야록은 전합니다. 박은식은 같은 시기 황성신문의 장지연과 함께 ‘쌍두마차’처럼 활약했습니다. 1906년 설립된 대한자강회에서도 매달 발행하는 대한자강회월보의 논설 집필을 요청받았죠.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일제를 강력하게 규탄하고 대한제국의 자강을 외치면서 그의 이름이 높아진 영향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떠난 뒤 1908년 입사한 황성신문에서도 박은식의 붓은 멈추지 않았죠. 평안도와 황해도 인사들 중심으로 결성된 서우학회의 임원으로 맡은 직책도 주필이었습니다.

왼쪽은 1917년 판 한국통사 표지이다. 한국통사는 1915년 처음 출간됐다. 가운데는 1920년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표지. 오른쪽은 1912년 출간한 안중근전의 한 쪽


박은식은 뼛속까지 유학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황해도 2대 신동'으로 꼽혔고 17세에 사서삼경에 통달했습니다. 방에 주자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매일 절을 올릴 정도였죠. 동아일보는 추모 사설에서 그를 ‘朴夫子(박부자)’로 높여 불렀습니다. 중국 밖의 공자라는 뜻이죠. 하지만 주자학에 매몰되진 않았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3, 6일자 기고 ‘학(學)의 진리(眞理)는 의(疑)로 좇아 구(求)하라’처럼 맹목적 추종보다 합리적 의심을 멈추지 않았죠. 바로 과학적 방법론입니다. 1909년 ‘유교구신론’에서 양명학을 받아들여 근대 유학의 길을 열었고 이후 사회주의까지 끌어안았죠. 교육자강을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오른쪽은 1925년 3월 25일자 독립신문 호외. 탄핵안 통과로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면직과 새 대통령 박은식의 취임식을 거행한다는 소식 등을 담았다. 가운데는 2015년 10월 서울대 사범대 역사관 1층에 세워진 박은식 흉상. 박은식이 1900년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낸 교육자였던 점을 기렸다. 왼쪽은 박은식 등 애국지사 4명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1985년 1월 9일자 7면


그가 러시아에서 한족공보 주필로 일하고 노인동맹단에 가세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노인동맹단 대표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였죠. 하지만 희망에 넘쳐 돌아온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가 분열돼 민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5년째 하와이에서 ‘원격통치’ 중이었죠. 보다 못한 박은식은 ‘이완용보다 보다 더한 역적’이라는 매도를 받아가며 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최후수단인 이승만 탄핵과 대통령제 폐지를 박은식은 국무총리로, 2대 임시대통령으로 해냈습니다. 임시정부는 가까스로 국무령체제로 넘어가게 됐죠. 그는 유언으로 “독립운동을 하려면 민족적으로 뭉쳐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꿈이던 ‘한국건국사’ 집필은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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