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님, 당신처럼 눈 주고 떠난… 어머님 만나 절 많이 하셨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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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 선종]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해 28일 서울 중구 명동대성당을 찾은 한 신자가 기도하고 있다. 정 추기경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5월 1일 오전 10시 장례미사가 열린다. 사진공동취재단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해 28일 서울 중구 명동대성당을 찾은 한 신자가 기도하고 있다. 정 추기경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5월 1일 오전 10시 장례미사가 열린다. 사진공동취재단
허영엽 신부 천주교서울대교구 대변인·회고록 ‘추기경 정진석’ 저자
허영엽 신부 천주교서울대교구 대변인·회고록 ‘추기경 정진석’ 저자
2월 정진석 추기경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병원에 달려갔을 때, 추기경님은 저를 힘겹게 바라보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해.” 정 추기경님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꽁꽁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공학도이던 정 추기경님이 사제의 길을 결심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정 추기경은 외동아들인 자신만을 보고 홀로 살아온 어머니에게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랜 고민 끝에 사제의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이 어미는 걱정하지 말고 네 뜻대로 하렴!”

아들이 사제가 되고 훗날 주교가 되었을 때도 어머니는 말년까지 인천 부평에서 삯바느질을 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제의 삶에 사사로운 가족 일은 방해가 될 수 있다며 단 한 번도 아들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안 주려는 마음은 모자가 꼭 닮았습니다.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70대 중반이 된 어머니는 노환으로 혼자서 움직이기 힘들게 됐습니다. 정 추기경은 여러 번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으로 돌보셨잖아요? 이제는 어머니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셔도 돼요. 다른 이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사랑이에요.” 그제야 어머니는 살림을 정리하고 비슷한 처지의 분들이 많은 충북 음성 꽃동네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는지 아들에게 “사람이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며 사후 안구기증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는 잠자듯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 추기경 어머니의 세례명은 루치아입니다. 루치아 성녀는 로마시대 두 눈을 잃고 순교해 눈이 아픈 사람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정 추기경은 주변의 만류에도 어머니의 안구 적출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두 눈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빛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아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됐다고 합니다. 정 추기경도 그 모범에 따라 2006년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했습니다.

2006년 추기경 서임이 발표된 직후, 한 기자가 불쑥 질문했습니다. “만약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정 추기경님의 답은 이랬습니다. “엄마를 만난다면, 절을 하고 싶어요. 끝없이, 아주 많이.”

정 추기경님! “어머님을 만나 절을 많이 하셨나요?”

그동안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기억하겠습니다.

허영엽 신부 천주교서울대교구 대변인·회고록 ‘추기경 정진석’ 저자
#정진석 추기경#정진석 추기경 선종#허영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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