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정진석 추기경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병원에 달려갔을 때, 추기경님은 저를 힘겹게 바라보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해.” 정 추기경님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꽁꽁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공학도이던 정 추기경님이 사제의 길을 결심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정 추기경은 외동아들인 자신만을 보고 홀로 살아온 어머니에게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랜 고민 끝에 사제의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이 어미는 걱정하지 말고 네 뜻대로 하렴!”
아들이 사제가 되고 훗날 주교가 되었을 때도 어머니는 말년까지 인천 부평에서 삯바느질을 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제의 삶에 사사로운 가족 일은 방해가 될 수 있다며 단 한 번도 아들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안 주려는 마음은 모자가 꼭 닮았습니다.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70대 중반이 된 어머니는 노환으로 혼자서 움직이기 힘들게 됐습니다. 정 추기경은 여러 번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으로 돌보셨잖아요? 이제는 어머니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셔도 돼요. 다른 이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사랑이에요.” 그제야 어머니는 살림을 정리하고 비슷한 처지의 분들이 많은 충북 음성 꽃동네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는지 아들에게 “사람이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며 사후 안구기증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는 잠자듯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 추기경 어머니의 세례명은 루치아입니다. 루치아 성녀는 로마시대 두 눈을 잃고 순교해 눈이 아픈 사람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정 추기경은 주변의 만류에도 어머니의 안구 적출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두 눈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빛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아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됐다고 합니다. 정 추기경도 그 모범에 따라 2006년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했습니다.
2006년 추기경 서임이 발표된 직후, 한 기자가 불쑥 질문했습니다. “만약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정 추기경님의 답은 이랬습니다. “엄마를 만난다면, 절을 하고 싶어요. 끝없이, 아주 많이.”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