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가슴서 일장기 지운 이길용 기자…“저널리즘 정신 연구 이뤄져야”

박희제기자 입력 2021-04-27 15:29수정 2021-04-2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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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 기자 주도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한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DB
일제강점기 당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1899년~1950년 납북)는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 때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 말소사건 보도로 유명하다. 이 기자는 1991년 8월 15일 광복45주년을 맞아 건국애국장 추서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한국체육기자연맹은 1989년부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그는 스포츠 분야 기자로 알려져 있지만 재난이나 사건 현장에서 기획과 르뽀, 특종기사를 많이 썼다. 또 인천과 대전에서 민족독립을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그는 155㎝의 작은 키였지만 배재학당 시절 육상과 축구선수였다. 인천대 산하 인천학연구원의 이희환 학술연구교수(55)가 인천문화재단 지역연구지원사업으로 진행한 자료조사 연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심층적으로 밝혔다.

이 교수의 연구결과는 ‘한국민족문화’ 78호(2021년 3월 발간)에 ‘기자 이길용의 생애와 저널리즘의 지향’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됐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이 기자의 출생지가 기존에 알려진 경남 마산이 아니라 인천이고, 그가 강제 퇴직 당하기 전 10여 년의 기자 활동 기간 중 쓴 기사의 50% 이상이 사건 기사, 기획 연재, 르뽀, 탐사 보도기사였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일제강점기 투철한 저널리즘 정신으로 체육기사 외 다양한 현장 르뽀, 기획연재, 탐사보도 기사를 많이 쓴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 동아일보 DB
이길용 기자에 대한 기존 연구물로 한국체육기자연맹이 1993년 출간한 ‘일장기 말소 의거기자 이길용’이 단행본으로 유일하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역사적 의미 등을 짚어보는 논문은 상당수에 달한다. 이들 자료에서 이길용 출생과 관련해 ‘1899년 8월 15일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가 인천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인천에서 성장하면서 영화학교를 마치고 서울 배재학당에 진학했다.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지셔(同志社)대학에서 공부하다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 귀국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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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기록물은 또 그의 투옥과 동아일보 입사 과정에 대해 ‘이길용이 일본에서 귀국 직후 철도국에 취업해 근무하던 중 3·1운동을 맞아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를 잇는 연락책 역할을 맡았다. 비밀문건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다 검거돼 3년간 복역하고 1922년 출옥한 뒤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 권고에 따라 체육기자로 언론사에 발을 디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 기자가 가담했던 ‘3·1운동 1주년 선언문 배포사건’에 대한 1920년 3월 30일의 검찰 심문조서와 1920년대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기사 등을 통해 기존 기록물의 오류나 모순을 확인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추적했다.

이런 조사 결과 이 기자는 1921년 6월 1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뒤 철도국 대전지사에 근무하면서 동아일보 통신원 활동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조선인학생모임 선우회 창립모임에서 ‘장래조선’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는 등 사회활동도 벌이다 1921년 9월 21일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의 채용(사고로 알림)됐다. 통신원에서 정식기자로 채용됐는데, 송진우 사장의 권유로 언론인이 됐다는 기존 기록물은 오류 가능성이 높다.

그는 1923년 6월 24일자로 동아일보 대전지국에서 고향인 인천지국 기자로 소속을 바꿨다. 고향에서 왕성한 기사 작성에 나섰다. 1923년 8월 12일 황금 민어어장이었던 인천 옹진군 굴업도에 거대한 폭풍우가 몰려와 항구와 민가가 아비규환과 같은 지옥으로 변했다. 이 기자가 즉각 현장으로 파견돼 8월 16일자 동아일보에 ‘태풍으로 인해 선박 200여 척 파괴, 해일과 폭풍으로 130호 가옥 파괴, 민어잡이 어선 200척 조난’ 등의 피해 상황을 알렸다. 그는 기사 서두에 “전보나 전화는 그만두고 인편까지 끊어진 무변대해의 고독한 섬”이라고 참상을 보도했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6년까지 전국을 누비며 현장 르뽀, 기획 연재물 기사를 수없이 출고했다. 비행기와 철도를 탄 시승기와 전국 도서를 순례하며 국토 현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기사는 △‘함흥 수조공사장 감독의 주민살상사건 진상’(1929년 11월 24일) △‘해저의 정취’(1929년 7월 3일) △‘장호원 총검 범인 혈상결사대 김선학’(1930년 12월 16, 17일 2회 연재)△‘기적(汽笛) 들린지 삼십년’(1930년 11월 13일~12월 6일 12회)△‘홍수 지옥에서 본 눈물과 사랑’(1933년 8월 3일) 등이다.

이 기자는 1920년대 중반 인천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에 나섰다. 진보적 청년단체였던 ‘제물포청년회’ 초대회장, 인천 최초 빙상경기대회 개최 준비위원장, 인천영화학우회 간사, 조선청년총동맹 인천지역 집행위원(조봉암과 함께 2인 대표)을 맡았다.

이 교수는 “스포츠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토 순례로 나라의 실상을 알리려는 저널이길용 기자의 저널리즘 정신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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