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어디냐 물으신다면[이재국의 우당탕탕]〈52〉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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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일찌감치 고당 조만식 선생이 ‘고향을 묻지 마라’는 표어를 내 걸고 지역 감정 타파에 앞장섰다. 고향을 묻는 게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친근감이긴 하지만, 그걸로 선입견을 갖는 사람들도 많고 역효과가 더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요즘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인종차별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고향이 다르면 어떻고, 인종이 다르면 어떤가. 결국 우리는 같은 지구별에서 살다가 가는 건데.

얼마 전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때 아닌 고향 논쟁이 발생했다. 우리는 모두 서울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들이었고, 고향도 각자 달랐다. 술자리가 무르익었는데 평소에도 고향 묻는 걸 좋아하는 한 친구가 옆 친구에게 물었다. “그럼 넌 전주에서 태어난 거야?” “전주에서 태어났는데 두 살 때 아버지 직장 때문에 충남 부여로 이사를 갔다가 거기서 6학년 때까지 살았고, 중학교에 가면서 다시 전주로 왔어.” “그럼 전주가 고향이 아니네. 전주에서 산 것보다 충남 부여에서 산 날이 더 많잖아.” “그래도 전주에서 태어나고 중고등학교를 전주에서 다녔으니까 고향은 전주지.” “대학은?”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고, 군대 제대한 다음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지.” “그럼 서울에서 산 기간이 더 많네. 그런데 왜 고향을 전주라고 해?” “어릴 때 살던 곳이니까 고향이라고 하는 거지. 그럼 너는?”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나는 충북 보은에서 살았는데, 우리 고향에 댐이 들어오면서 고향이 수몰지구가 됐어. 그래서 일곱 살 때 대전으로 이사를 했어. 그리고 대전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지.” “그런데 넌 왜 맨날 고향이 대전이라고 하냐. 충북 보은이면서?” “대전에서 더 오래 살았으니까 대전이 고향이지.” “오래 산 걸로 치면 서울에서 더 오래 산 거 아냐?” “오래 살긴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 그래도 고향은 대전이야!”

사실 나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학교를 졸업했지만,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는 고향에 자주 안 가는 편이다. 그래도 고향은 늘 충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서울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요즘은 고향에 대한 감흥이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예전에는 어쩌다 고향에 가면 고속도로 충주 톨게이트를 나가면서부터 뭔가 가슴이 뭉클하고 사과나무 가로수길을 지날 때면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했다. 요즘은 고향도 많이 변했고 학창 시절 자주 가던 떡볶이집이나 중국집도 모두 사라져서 고향의 향수를 느낄 만한 곳이 별로 없다. 그래서 고향 갈 때보다 고향에서 서울 올 때, 뭔가 퀴퀴한 매연 냄새가 나고 적당히 흐린 서울 하늘을 봐야 마음이 놓인다. 역시 살 붙이고 살면 가족이고, 정들면 고향인 걸까.

해석이 분분하겠지만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 고향이라는 말이 가장 와 닿았다. 태어난 곳이 아닌, 그립고 정든 곳을 물어본다면 지역 감정보다는 추억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은 서울에 처음 와서 자취하던 신월동 언덕길이 생각난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는데 3년간 살다 보니 단골 식당도 생기고 단골 서점도 생겨서 많이 의지하고 위안이 됐던 곳, 신월동 청기와 주유소 앞 동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고향#논쟁#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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