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과 윈즐로 호머의 수영복[움직이는 미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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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 신동아 기자
송화선 신동아 기자
그레타 거위그 감독 영화 ‘작은 아씨들’(2019년)은 주인공 조가 뉴욕 한 잡지사 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 들어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작가를 꿈꾸는 조는 이곳에서 편집자 대시우드에게 직접 쓴 소설을 건네고, 게재 약속과 함께 고료 20달러를 받는다. 신이 난 조가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뉴욕 거리를 내달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의 들뜬 표정과 대조적으로 조 앞에 놓인 현실은 간단치 않다. 대시우드는 그의 원고를 사정없이 난도질하며 이렇게 말한 참이다. “막 전쟁을 겪은 나라예요. 사람들은 설교가 아니라 즐거움을 원하죠. 요즘 세상에 도덕은 안 팔려요.” 앞으로 좀 더 ‘짧고 자극적인’ 글을 쓰라고 조언하며 대시우드는 이런 주문도 덧붙인다. “주인공이 여자라면 끝에 꼭 결혼을 시키세요. 아니면 죽이든지요.”

이 영화 원작은 1868년 루이자 메이 올컷이 발표한 동명 소설이다. 대시우드의 말은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미국 현실을 생생히 보여준다. 사회 곳곳에 자유와 활기가 넘치고 ‘도덕’은 흘러간 옛 얘기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여성에게 허락된 운명은 여전히 ‘결혼’ 아니면 ‘죽음’뿐이다. 이 시대 작가가 되고자 분투하는 조의 모습을 보면, 바로 그 시대 활동한 미국 화가 윈즐로 호머(1836∼1910)의 한 작품이 떠오른다.

호머는 남북전쟁 시절 종군 화가였다. 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들로 명성을 얻었고, 1865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회원이 됐다. 일찌감치 성공 가도에 접어든 그가 종전 후 관심을 둔 건 미국 사람의 구체적 삶이었다. 호머는 화구를 챙겨들고 집 밖으로 나가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1870년 발표한 ‘매사추세츠 맨체스터 이글 헤드’도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다.

그림 배경은 매사추세츠의 한 바닷가. 여성 세 명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들의 드레스가 하나같이 물에 흠뻑 젖은 걸 보면 막 해수욕을 마친 듯하다. 한 여성은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치마를 걷어 올려 물기를 짜고, 다른 여성은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아 신발을 매만지고 있다.

이 작품은 공개 즉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여성들 맨다리가 훤히 드러난 게 특히 문제가 됐다. 당시 여성들은 해수욕할 때조차 정숙할 것을 요구받았다. 코르셋과 속바지를 갖춰 입고 그 위에 드레스까지 걸친 채, 익사하기 딱 좋은 차림으로 헤엄을 쳤다. 호머의 작품은 이 사회적 규범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줬다.

당시 사회가 이를 호락호락 용납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미국 잡지 ‘에브리 새터데이(Every Saturday)’에는 이 유화를 대대적으로 수정한 그림이 실렸다. 이제 해변의 여성들은 종아리를 다 가리는 바지를 입고 있다. 현재 이 그림은 두 버전이 다 남아 비교의 재미를 준다.

거위그 감독은 ‘작은 아씨들’ 개봉 무렵 미국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구상하며 조와 동시대를 산 화가 호머의 그림을 많이 참고했다”고 밝혔다. 뉴욕 거리를 내달리는 조의 자신만만한 표정 위에는, 호머가 담아낸 해변의 여성들 모습이 겹친다. 권위적 도덕주의 안에서 자유를 꿈꾼 이들은 시대를 넘어 영감의 주인공이 됐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작은 아씨들#윈즐로 호머#수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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