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아일랜드 걸으며 온전한 ‘나’를 만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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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걸음/리베카 솔닛 지음·김정아 옮김/468쪽·1만9000원·반비

아일랜드 골웨이만 남서쪽으로 넓게 펼쳐진 석회암 지역 버런은 유명한 관광지다. 삶의 터전에서 이국적 여행지로 변한 이곳에서 저자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클리셰를 남발하기보다 그것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한다. ⓒBurren and Cliffs of Mother UNESCO Global Geopark
아일랜드 골웨이만 남서쪽으로 넓게 펼쳐진 석회암 지역 버런은 유명한 관광지다. 삶의 터전에서 이국적 여행지로 변한 이곳에서 저자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클리셰를 남발하기보다 그것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한다. ⓒBurren and Cliffs of Mother UNESCO Global Geopark
아일랜드 코크의 좁고 어두운 펍에서 리베카 솔닛은 한 걸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굽은 무릎 탓에 게처럼 걷는 걸인을 동네 아이들은 두려움의 눈길로 봤다. 걸인의 걸음걸이는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대기근과 연관돼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장례식을 치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가난한 부부는 죽은 막내아들을 차마 구덩이에 버릴 수 없어 관을 만들었지만 아이의 몸을 담기에 작았던 것. 결국 아이의 다리를 분질렀다. 하지만 아이는 살아있었고 훗날 코크를 떠도는 걸인이 됐다.

솔닛은 과거의 죽은 기록인 줄 알았던 역사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매료된다. 아일랜드를 여행 중인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칠 걸인의 모습에서 역사와 기억에 관한 사유를 펼쳐나간다.

이 책은 솔닛이 26세이던 1987년, 족보를 연구하던 삼촌 덕분에 아일랜드 여권을 받게 되면서 떠난 여행으로 시작됐다. 한 달간 대부분을 걸어서 아일랜드를 누빈 그는 풍부한 조사와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길에서 혹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떠올린 단상을 적어둔다. 1997년 출간된 이 책은 4년 뒤 솔닛에게 명성을 안겨준 ‘걷기의 인문학’으로 발전됐다.

자신이 자란 미국 캘리포니아는 ‘뿌리 없는’ 지역이라 고백하는 그가 아일랜드로 떠난 것이 자신의 혈통을 찾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길을 걸어가며 정해진 개념과 정의를 풀어헤친다. 더블린의 자연사박물관 구석에 진열된 나비 한 마리를 보고 반(反)제국주의자였던 로저 케이스먼트의 이야기로 흘러가는 식이다. 공식적 역사의 샛길로 향하며 살아있는 생생한 장면들을 건져낸다.

절정에 달하는 건 켄메어 환상열석(還狀列石)을 마주할 때다. 온갖 거창함과 장식이 사라진 벌거벗은 풍경 앞에서 그는 내면의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혈통이라는 것이 믿으면 만들어지는 ‘신앙 고백’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몸 하나만 남은 존재’가 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의 온전함을 이야기한다.

국내에서 솔닛은 페미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유의 과정을 따라가면 고정된 개념에 그를 가두는 것이 오독임을 느낀다. 2017년 국내 강연에서도 페미니즘에 관한 질문만 받자 당황한 듯 “내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갖고 있지 못하지만, 그런 척해야 하는 자리인 것 같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 책은 솔닛의 서술이 분열이나 편들어 주기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체제에서 배제된 인간의 이야기란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책의 막바지에서 그는 아일랜드의 ‘트래블러’를 이야기한다. 유럽의 집시처럼 아일랜드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 트래블러를 통해 유럽과 영국의 비주류로 간주된 아일랜드에서조차 차별받는 존재들이 있음을 말한다. 관광객을 위한 여행책자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틈바구니를 파헤치는 과정은, 지역을 속속들이 체득하는 여행의 지적 흥미를 일깨워준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마음의 발걸음#리베카 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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