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랑-휴머니즘… ‘아시안 스토리’ 할리우드 사로잡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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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 보편적 정서-신선한 소재로 바람몰이
‘더 페어웰’ ‘우리 사이 어쩌면’ 등 평범한 이민자 가정 이야기 큰 반향
재미교포 이민진 소설 ‘파친코’… 애플의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 중
어느 사회나 공감하는 일상 속 사연… 문화적 다양성 담은 콘텐츠에 열광

넷플릭스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남녀 주연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을 선보인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남녀 주연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을 선보인다. 넷플릭스 제공
공항에서 집까지 어떻게 왔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딸이 말한다.
“서비스 카 탔어요.” 이어 아버지가 우려하며 하는 질문. “너 팁 줬니?” 딸이 농담으로 답한다. “(팁 안 주려고) 중간에 차에서 뛰어내렸어요.”

북미의 팁 문화에 인색한 아시아인 이민 1세대를 ‘셀프 디스’하는 이 장면은 넷플릭스에서 올해 5월 공개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Always Be My Maybe)’에 자연스레 녹아 있다. 어릴 때 함께 자란 마커스(랜들 박)와 사샤(앨리 웡)가 15년 만에 재회하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요리하는 장면에 “우리 한국 사람들은 모든 음식에 가위를 쓰지”라는 대사를 사용하거나 한국의 대표음식 김치찌개가 감초처럼 등장한다. 아시아 문화를 희화화해 불편한 억지웃음을 유발하거나 아시아 문화의 독특한 점을 굳이 설명하거나 알리려 들지 않는다.

○ ‘아시안 오거스트’ 시즌 2

‘아시안 오거스트(Asian August·아시아의 8월)’의 거센 돌풍이 할리우드를 휩쓴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8월 미국에서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전 세계에서 2억3800만 달러(약 2900억 원)를 벌어들였다. 아시아인만 출연하는 이 영화는 ‘섹스 앤드 더 시티’를 제치고 로맨틱 코미디 장르 역대 흥행 6위에 올랐다. 비슷한 시기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아시아계 여자 주인공이 출연하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와 존 조 주연의 독특한 형식의 스릴러 ‘서치’도 이 열풍에 힘을 보탰다. 중국인 이민자의 이야기를 다뤄 큰 반향을 일으킨 웨인 왕 감독의 ‘조이 럭 클럽’(1994년) 이후 25년 만의 변화다. 아시아계 영화의 흥행으로 뜨거운 8월을 지켜본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닌자나 공부벌레, 무술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아시아인도 사랑하고 싸울 줄 아는 ‘인간’으로 비친 것 같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이 돌풍은 ‘원 히트 원더’(한 곡만 흥행한 가수)로 그치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할리우드 콘텐츠 지형도를 바꿔놓는 중이다. 올해 7월 미국에서는 중국계 이민자와 그 가족 이야기를 다룬 ‘더 페어웰(The Farewell)’이 개봉돼 호평을 받았다.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는 거대 제작비가 투입된 애플의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일제강점기 오사카로 건너간 조선인의 이야기를 다룬 원작 소설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눌린 인간의 삶을 다뤘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미국 독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이 럭 클럽’의 웨인 왕 감독은 5일 열리는 캐나다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커밍 홈 어게인’을 공개한다. 재미 한인교포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이 작품은 재미 소설가 이창래 씨의 자전적 에세이를 원작으로 했다. 배경 음악으로 가수 이문세의 ‘옛사랑’이 흐르고 한국의 전통음식 갈비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 보편적 소재와 결합된 신선함

‘새로움’에 목마른 미국 할리우드에 아시아 문화가 단비가 되고 있다. 아콰피나 주연의 ‘더 페어웰’은 중국인 가족을 중심으로 보편적인 가족 관계와 인간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현지에서 개봉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IMDb 캡처
‘새로움’에 목마른 미국 할리우드에 아시아 문화가 단비가 되고 있다. 아콰피나 주연의 ‘더 페어웰’은 중국인 가족을 중심으로 보편적인 가족 관계와 인간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현지에서 개봉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IMDb 캡처
‘이것은 아시아 영화가 아니라 휴먼 영화다.’

할리우드가 ‘아시아’라는 소재에 열광하는 이유는 올해 ‘더 페어웰’이 얻은 호평에 그 답이 있다. 중국계 미국인 룰루 왕이 연출한 이 작품은 중국계 이민 2세 ‘빌리’가 친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향하는 얘기를 다뤘다. 할머니는 말기 암 진단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숨긴다. 미국식 사고로는 도무지 이런 결정을 이해할 수 없는 빌리는 할머니를 만나러 중국으로 향하고 다른 가족들도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모인다.

유튜브에 올라온 이 영화 트레일러에 각국 사람들이 단 댓글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나이지리아 사람이라고 밝힌 이는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다. 가족 관계는 나이지리아에서도 똑같다”고 하자 이집트인과 멕시코인이라고 밝힌 사람들도 “가족의 모습은 다 똑같다”며 맞장구를 친다.

재미 소설가 이창래 씨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 ‘커밍 홈 어게인’은 ‘조이럭 클럽’으로 25년 전 할리우드에 아시안 바람을 일으킨 웨인 왕 감독의 신작이다. 토론토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재미 소설가 이창래 씨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 ‘커밍 홈 어게인’은 ‘조이럭 클럽’으로 25년 전 할리우드에 아시안 바람을 일으킨 웨인 왕 감독의 신작이다. 토론토국제영화제 홈페이지
국내 한 드라마 제작사 대표는 “가족, 사랑, 휴머니즘은 어느 사회나 공감하는 보편적인 소재”라며 “이를 아시아적 시각으로 새롭게 풀어낸 것이 할리우드에서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주도하는 건 미국 사회와 융화되며 세련된 방식으로 아시아 문화를 소개하려 하는 이민 1.5세대, 2세대 배우 및 제작자들이다. 캐나다 CBC방송과 넷플릭스로 공개돼 시즌 2까지 화제가 된 ‘김씨네 편의점’은 한국계 캐나다인 인스 최의 원작 연극을 바탕으로 했다.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븐 연은 배우 윤여정과 한예리를 캐스팅해 한인 이민자 소재 영화 ‘미나리’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근 디즈니 ‘인어공주’ 역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캐스팅하거나 마블 영화에 아시아계 히어로가 등장하는 등 콘텐츠에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을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이는 것도 아시아 문화가 주요 소재로 급부상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커밍 홈 어게인’의 노혜진 책임프로듀서는 “세계적으로, 또 미국 내에서도 다원화된 시각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고 그런 시각을 반영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최근에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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