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정상회담, 이제 1회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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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에서 이변(異變)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올해 초부터 그야말로 기적처럼 이어져 온 한반도 대화 모멘텀이 27일 남북 정상회담으로 첫 시험대에 오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 비핵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찾으면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외교 이벤트 중 하나로 기록될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토양을 마련하게 된다.

미증유의 일들이 계속되면서, 한때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점점 잊혀지거나 심지어 부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을 향해 ‘로켓맨’이라며 욕하고 유엔에서 ‘파멸시켜 버리겠다’고 한 게 불과 7개월 전 일이다. 지난해 말 김정은이 6차 핵실험에 이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시험을 하며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건 몇 년 전 같다. 이럴 때는 트럼프, 김정은이 처한 진짜 상황과 속내를 짚어보면 판단에 도움이 된다.

우선 김정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체제 보장과 안정적 장기 집권 기반이다. 그런데 2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자신의 정책적 지향점이었던 병진 노선을 포기하고 핵실험 중단을 선언하면서 세상을 더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그가 갑자기 평화주의자가 됐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효과를 놓고 숱한 관측을 낳았던 트럼프 주도의 대북경제 제재의 여파가 심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전히 많은 한반도 전문가들은 경제난을 무릅쓰고 어렵게 만들어낸 핵무력을 김정은이 쉽게 포기하겠느냐고 한다. 이 때문에 미국 워싱턴에선 이도 저도 아닌 김정은의 ‘시간 벌기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원칙적으로 비핵화를 언급하며 핵무기를 당장 포기하지 않으면서 경제 활성화를 위한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다. 애덤 마운트 미국 과학자연맹(FSA) 선임연구원이 CNN 인터뷰에서 “핵무기나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최소한의 제한을 추구하면서 대북제재 완화, 한미 군사동맹 약화 등을 시도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기류를 담은 것이다.

트럼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도 시리아도 아니라 올해 11월 중간선거다. 러시아 대선 개입 의혹을 넘어 남은 임기 동안 ‘레임덕’을 피할 수 있을지, 더 나아가 2020년 재선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중간선거를 앞둔 그에게 시급한 것은 국제정치적 레거시다. 지금까지 대외적으로는 이슬람권 이민자에 대한 비자 발급 중단이나 시리아 공습 외엔 딱히 드러낼 게 없는 트럼프는 중간선거 경선이 시작될 여름이 다가올수록 북핵 이슈에서 어떻게 하든 성과를 내려고 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올해 김정은이 돌변하자 예상보다 훨씬 빨리 정상회담 문턱까지 간 것은, 한반도를 너무 사랑해서도, 북한 인민을 매우 불쌍히 여겨서도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속내는 없다. 전쟁을 막고, 그러다가 한반도 운전석에 앉을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올해는 예상 밖의 고공행진이지만, 행여 북-미 정상회담이 별 성과를 내지 못하면 군사적 긴장이 재연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 있다. 막상 회담이 다가오니 살얼음판 같은 아슬아슬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요즘 여권 인사들을 만나보면 남북 정상회담이 한반도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더러 있다. 청와대 논평에서 “민족적 과업을 실천해 나가겠다”는 말이 나올 때는 국운(國運)을 건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항로에 막 접어든 것일 뿐이다. 다른 선수들은 우리와 다른 목적으로 이 판에 뛰어들고 있다. 너무 긴장할 필요도, 흥분할 것도 없다. 야구로 치면 이제 1회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남북 정상회담#레임덕#북미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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