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습구타 호소에… 중대장 “너도 다칠수 있어” 겁주며 덮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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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윤일병을 구하라]
<中>인권지옥 자초한 軍-병영속 은폐되는 가혹행위
말하면 귀 막고… 터지면 입 막고

인권지옥 자초한 軍
저녁이면 의무병들이 생활하는 컨테이너에서 ‘고문식’이 열렸다. 차가운 바닥에 한참 동안 머리를 박고 있으면 목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선임 병장은 수술용 메스를 들고 와 배 아래를 향해 날을 세웠다. “너 쓰러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 그는 의무대 수술 도구를 고문 기구로 사용하곤 했다. 붕대 가위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이마를 대는 자세로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견디다 못해 쓰러지면 기다렸다는 듯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 병사의 신음소리, 듣지 않는 군(軍)의 ‘귀’


2012년 7월 입대해 10월 육군 모 사단 의무중대에 배치됐던 임모 이병(22)이 수없이 당했던 폭행 중 한 장면이다. 그는 올해 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및 정신적 쇼크 증상을 보이다 상병으로 의병 전역했다. 임 이병은 2년 전 본부와 고립된 의무대에서 이미 또 다른 ‘윤 일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작은 자대 배치 직후 유격훈련에서였다. 선임 한 명이 “많이 처먹어라”며 동료들 앞에서 임 이병을 놀렸다. 평소 올곧은 성격이었던 임 이병이 “말씀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자 배로 주먹이 날아왔다. 그때부터 부대 안에선 임 이병을 두고 온갖 비방이 퍼지기 시작했다. ‘개 폐급’ ‘또라이’ ‘× 같은 개년’이 임 이병의 ‘군대 이름’이었다.

폭력은 더 잔인해졌다. 임 이병과 가족에 따르면 선임 A 상병은 임 이병에게 엎드려뻗쳐를 시킨 뒤 성기를 걷어찼다. 임 이병이 비명을 지르면 “×나 야한 소리 내네”라며 비웃었다. B 병장은 근무 중인 임 이병의 뒤에서 귀를 깨물고 젖꼭지를 잡아 비트는 등 성추행을 일삼았다고 했다. “홍콩 보내주겠다”며 발로 성기를 차면서 “어디까지 갔냐”고 묻기도 했다.

임 이병은 좁은 의무대 안에서 도망칠 곳이 없었다. 폭력이나 욕설에 가담한 이들은 의무중대 소속 상병 6명과 병장 2명, 일병 2명 외에 의무지원관이었던 하사도 포함됐다. 부대에는 형식적인 ‘마음의 편지’ 신고함조차 설치돼 있지 않았다.

폭행이 6개월째 지속되던 2013년 3월 당시 중대장은 임 이병의 군 인성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을 보고 호출했다. 임 이병이 그간의 사정을 모두 이야기하자 중대장은 “어떻게 할 거냐. 너도 잘못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겁먹은 임 이병에게 중대장은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같은 해 6월 심리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임 이병은 사단 의무대 정신과에 입원했다. 조사에 들어간 헌병대가 임 이병을 가해자 2명과 대질신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임 이병은 가해자들을 보자마자 수사관실을 뛰쳐나가며 소리를 치고 울음을 터뜨렸다. 수사관은 가족들에게 “가해자들을 강제로 고문해서 진술을 받을 수도 없고 대질을 해서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이후 임 이병은 반복적인 쇼크를 일으킨 끝에 응급 후송되는 등 병원 치료를 받다 올해 초 의병 전역했다.

임 이병은 현재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으며 부모와 함께 법정 소송을 진행 중이다. 가해자 11명 중 당시 상병 한 명만 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김숙경 군인권센터 실행위원은 “가해자가 재판정에서 범행 사실을 일부 인정하고 ‘뉘우친다’고 밝혔지만 다른 가해자들의 범행 내용과 성추행 혐의 등에 관해서는 수사가 미뤄지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 군 간부들이 폭행 가담·은폐에 급급


임 이병의 사례는 부대 내 가혹행위를 단속해야 할 간부들이 폭행에 가담하거나 사고 축소에만 매달리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서 복무 중인 한 육군 병장(22)은 “병사보다는 거기에 말뚝 박고 사는 간부들이 바뀌어야 한다. 간부들이 귀찮아하거나 관심을 주지 않는 부대는 그만큼 썩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 이병 사건을 포함해 본보 취재 결과에서도 간부들이 ‘주도’한 폭행 및 은폐 문제가 드러났다.

본보가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단독 입수한 2011년 2월 육군 17사단 정모 이병(20) 자살 사건은 가해 병사와 지휘관들이 증거를 인멸하거나 전말을 은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선임과 간부들은 정 이병을 당시 유행했던 이종격투기 기술을 써보기 위한 ‘샌드백’으로 취급했다. 부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선임은 정 이병을 세워놓고 “야, 가드 올려”라고 말한 뒤 로킥, 하이킥을 날리는 등 구타를 서슴지 않았다.

정 이병이 자살하기 전 중대장은 부대 병장과 규정을 어기고 술을 먹고 들어왔다. 해당 병장은 분대장에게 ‘정 이병의 구타를 허용함’이라고 명령서를 써 전달하기도 했다. 그날 정 이병이 자살한 뒤 분대장은 명령서를 없앤 것으로 확인됐다. 책임 지휘관들은 부대원들에게 “같은 운명이니 부대관리 제대로 했다고 말을 맞춰야 한다”고 하는 등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다.

같은 해 8월 해군 2함대의 작전사령부 5전단 소속 수송함에서 복무하다 함정 안에서 목을 매 자살한 박모 일병(20) 사건도 그동안 자살 원인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권익위에 따르면 갑판병으로 근무했던 박 일병은 선임병들의 지속적인 구타와 욕설에 시달렸다.

박 일병은 입대 당시 인성검사에서도 ‘군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정상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선임들은 박 일병을 그의 동기들과 비교하며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다. 컵라면을 훔쳤다고 오해했단 이유로 박 일병의 뺨을 때렸다. 결국 박 일병은 함정 안 창고 천장에 로프로 목을 맸고 이후 민간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사 판정을 받고 그해 9월 국군수도병원에서 숨졌다. 그 후 전단 참모장 등 6명이 부대 진단을 실시한 결과 가해자들은 처벌을 우려해 “규정대로 했다”며 부대원과 간부들이 말을 맞추거나 사건을 축소하려 한 점이 드러났다. 담당 간부들은 소속함 장병들에 대한 자살예방 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부대원에 대해서도 관찰 위주의 형식적인 신상관리에 그쳤다. 당시 소속함 장병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근무 중 구타 및 언어폭력을 경험한 장병이 62%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어떤 후속 조치도 없었다. 군 간부들이 소중히 챙겨야 할 부하들을 무심하게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셈이다.

곽도영 now@donga.com·정성택 기자
#윤일병#고문식#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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