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석가영산회도’ 국내 환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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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숭상 조선왕실이 佛畵 의뢰 이례적
왜군이 북상하며 절 불태우고 강탈해가

문명대 명예교수
문명대 명예교수
좌선한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무릎에 얹고 다섯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전형적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자세. 이는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를 항복시키고 얻은 정각(正覺·올바른 깨달음)의 표현이다. 석존의 불안(佛眼)엔 갸름한 얼굴선과 눈매를 따라 엷은 미소를 머금어 품격이 우러났다.

석가영산회도(가로 90cm, 세로 104.5cm)는 42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렇게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팽팽한 어깨선과 가슴, 상대적으로 잘록한 허리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조선 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광배(光背·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현한 것)의 청록색이 세월에 다소 바랬고, 금을 바른 몸체가 옅어지고 주름지긴 했어도 그림의 원형은 대부분 살아있다.

이번 석가영산회도는 그림 가운데 아래 부분에 화기(畵記·조성기록)가 명확히 남아 연원을 밝히기가 어렵지 않았다. ‘만력(萬曆) 20년 임진년 원월(元月·1월)에 백족산(百足山) 석남사(石楠寺)에서 완성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즉,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에 불화가 그려진 것이다. 왜군이 북상하며 석남사가 불타 없어진 점을 감안하면 이때 그림을 일본으로 강탈해갔음이 확실하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한국미술사연구소장)는 “1592년에 조성된 불화는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됐다”고 말했다.

화기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시주(施主)로 올라있는 인물이다. 관여한 승려들 위에 ‘강 씨 상궁(上宮) 양위(兩位·2명)’라고 기록돼 있다. 문 교수에 따르면 상궁(上宮)은 상궁(尙宮)과 혼용해 쓰곤 했다. 왕이나 왕비를 모시는 상궁이 자기 마음대로 불화를 조성했을 리가 없다. 선조 때라면 유교문화가 팽배했던 시절. 상궁들이 주군의 명을 받든 ‘왕실 발원 본’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이렇게 상궁이 발원한 경우는 19세기 말기엔 종종 있으나 조선 전기에는 매우 드물었다.

불화의 사천왕 가운데 다문천(多聞天·북방 수호신)이 오른손에 작은 탑을 올려놓고, 백의(白衣) 관세음보살이 진영 왼쪽에 배치된 점은 당대보다 앞선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문 교수는 “조선 전기 영산회도 가운데 국보에 오른 경우가 없다”며 “사료로서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데다 예술적으로도 독특한 매력이 풍부해 최소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했다. 문 교수는 이 같은 연구 결과가 담긴 논문을 다음 달 초 ‘강좌 미술사’에 발표할 예정이다.

영산회도가 일본에서 환수됐다는 점도 의의가 크다. 일본에는 고려·조선 불화를 비롯해 많은 우리 문화재가 산재해 있지만 대부분 현지에서 대를 물려 신품(神品)으로 모시고 있어 접근조차 어렵다.

문 교수와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는 “이번 사례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공을 들이는 게 문화재를 되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입을 모았다. 주승진 고미술연구소 무유헌 대표도 “무조건 강탈했으니 돌려달라고 몰아세우면 거사를 망친다”며 “신뢰를 쌓아 ‘태어난 땅으로 돌려보내자’고 순리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귀한 문화재에 가격을 매겨선 안 되겠지만 이런 정도의 조선 불화는 얼마나 가치를 지닐까. 고미술계에 따르면 1990년대엔 적게 잡아도 고려 불화는 30억 원, 조선 불화는 10억 원부터 거래를 시작했다. 지금은 유통되는 물량이 적어 기준가를 잡기가 쉽지 않다. 한 전문가는 “지금도 완성도가 높고 희귀하면 조선 불화도 몇십억 원으로 훌쩍 뛴다”고 귀띔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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