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만든 펀드예요. 그래도 남인데 무이자로 빌려줄 수는 없잖아요. 다른 곳보다 이자는 낮은 편이에요.”
19일 오전 동아일보 취재팀은 서울에 있는 한 명문대 화장실 문에 붙어 있던 명함 크기의 광고전단에 쓰여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이 빌려주는 100만 원’이라는 제목의 광고물이었다. 상대편에서 사근사근한 30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98학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A 씨는 전화 너머로 “○○대 학생이냐”고 물은 뒤 “다른 학교에 다니면 그 학교 선배를 연결해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은 대부업자가 아니며 ‘후배들을 위한 펀드’를 운영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다는) 신용 기록이 남으면 나중에 대출할 때 불이익이 많잖아요. 그래서 선배들이 돈을 모은 거예요. 시작한 지 2년 정도 됐는데 지금까지 ○○대에서만 614명이 이용했어요.”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로 정부가 ‘불법 사(私)금융과의 전쟁’에 나선 지 100여 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법 사금융이 대학가를 파고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대적인 단속으로 대학생들 사이에서 불법 사금융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자 ‘학교 선배’, ‘펀드’ 등의 용어를 앞세워 대학생들을 안심시킨 뒤 고금리로 대출을 하는 수법까지 등장했다.
대학생으로 가장하고 불법 사금융 추적취재에 나선 취재팀에게 A 씨는 “선배들이 빌려주는 것이라 이자는 6%로 낮다”고 말했다. 그러나 A 씨가 말한 금리는 연(年)이 아니라 월(月) 단위였다. 100만 원을 빌리면 6만 원을 선(先)이자로 떼고 매달 6만 원을 이자로 받는 연이율 72%의 고금리다. 이자제한법과 대부업법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하지 않은 미등록 대부업체나 개인은 연 30%까지만 이자를 받을 수 있으며 이를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을 받게 된다. 또 등록 대부업체도 연 39%까지만 이자를 받을 수 있도록 돼 있다.
계약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취재팀이 받은 e메일 계약서에는 계약 주체가 ‘○○ 엔젤 펀드’로 돼 있었다. 계약서에 찍힌 사업자번호는 나중에 취재팀이 국세청 웹사이트에 확인해본 결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 씨는 펀드에 대해 “연락이 끊어지는 채무자가 있을 때 채권추심업체에 의뢰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계약서에는 ‘2일 연체 시 채무자의 등본 주소로 대출 내용을 발송하고 이자 총액의 50%를 원금에 덧붙인다’, ‘3일 연체 시 원금을 회수하고 친인척, 보증인에게 연락한다’ 등 대출을 받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A 씨는 이 학교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학내 인터넷 홈페이지에 비슷한 내용의 광고를 지난해와 올해 올리기도 했다.
26일 저녁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A 씨는 “유명 외국계 정보기술(IT) 기업에 근무하고 있다”며 자신의 사원증까지 보여줬다. 그는 “○○대 공대를 졸업했고, 재학 시절 벤처창업에 관심이 많아 관련 동아리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 “7개 대학 출신 7명이 만든 펀드” 善意 가장한 유혹 ▼
그는 “우리 펀드가 서울 7개 대학 출신 7명이 모여 만든 프라이빗 펀드이며 5명은 회사원, 2명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한 번 더 고민해 보겠다”며 A 씨와 헤어졌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 대학생 298만 명 중 고금리 대출을 이용하는 대학생은 약 11만 명이다. 이 중 대부업체 및 사채를 이용하는 대학생은 3만9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급전이 필요한 대학생들이 사금융의 유혹에 빠져드는 이유 중 하나는 접촉이 쉽기 때문이다. 단속이 강화됐어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대학생 대출’을 검색하면 등장하는 업체들은 여전히 재학증명서 등 간단한 서류만으로 대학생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있다.
이상빈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사회 경험이 부족한 대학생들은 상환 능력 없이 대출을 받는 일이 신용도 등 향후 자기 인생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칠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김평화 인턴기자 연세대 응용통계학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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