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다]<7> 일자리 ‘미스매치’를 없애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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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이젠 학벌 필요없다” vs 취업 준비생들 “그말 누가 믿어?”
[‘공존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다]<7> 일자리 ‘미스매치’를 없애자,上현실은

《 “학점은 중간 정도면 되고 영어도 하한선만 맞추면 합격하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학점 4.0, 토익 950점, 자격증 7개 같은 ‘스펙’을 갖춘 지원자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A사 인사 담당 임원)

“고학점, 높은 토익점수, 자격증은 기본이고 공모전 참여와 인턴 경험도 있어야 서류전형이라도 통과하던걸요.”(서울 B대 4학년생)

한국의 취업 준비생들은 학점, 자격증, 토익 같은 스펙을 쌓는 데 열중하고 있다. 취업포털 조사업체인 잡코리아는 지난해 12월 대학생 2명 중 1명은 취업 사교육을 받고 대학생 한 명이 1년 동안 취업 사교육에 쓰는 돈은 평균 279만 원이라는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상당수의 대학생이 1년 이상 휴학을 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취업준비생들은 등록금을 제외하고 재학 간에 평균 1500만 원 가까이를 취업 사교육에 쓴다는 것이다.

과연 ‘스펙=취업’이라는 공식이 성립할까. 동아일보는 2일부터 13일까지 국내 10대 대기업 인사 담당자와 24∼31세의 취업준비생 8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인터뷰 결과 뽑는 쪽과 지원하는 쪽의 인식에 상당한 격차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널A 영상] 쌍꺼풀 만들고 코 세우니 취업성공…“열정만 본다더니”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스펙은 별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지원자들은 “현실에서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반박했다. 양측 모두 실명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업은 이미지 손상을, 지원자들은 취업 때 불이익을 걱정했다. 기업과 취업 준비생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취업 미스매치’ 문제를 2회에 걸쳐 다룬다. 먼저 일자리 미스매치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 다음 회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소개한다. 》

■ 10대 기업 인사담당자 인터뷰


동아일보가 인터뷰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방향을 잡고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은 극소수”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학벌, 학점, 토익, 자격증, 공모전, 인턴 경험 등 스펙이 취업에 끼치는 영향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양한 스펙을 쌓았더라도 정작 직무에 꼭 필요한 능력을 갖춘 지원자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전자회사인 A사 인사 담당자는 “실제 현업에 투입됐을 때 도움이 안 되는 스펙은 모두가 거품”이라고 했다.

○ 학점 토익 자격증에 대한 불편한 진실


입사를 위한 최소 학점을 묻자 대부분 4.5점 만점을 기준으로 중간 등급인 B(3.0∼3.2)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2.5만 넘으면 된다는 기업도 있었다. B전자회사의 인사 담당 임원은 “학점은 성실성을 보는 척도일 뿐”이라며 “회사에서 재교육을 받을 때 뒤처지지 않을 학습능력만 갖추면 된다”고 했다. 이 때문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역별 점수를 본다는 회사도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영업직의 경우 수능 언어영역 고득점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10명 중 8명의 인사담당자는 “무슨 과목을 이수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C회사 관계자는 “해당 학교에서 해당 전공을 이수한 선배들을 통해 어떤 교수가 학점을 잘 주는지를 파악하고 있다”며 “불필요한 교양과목에서 A를 받은 것보다 학점이 짠 전공과목에서 B를 받으면 더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영어점수에 대해 D사 관계자는 “해외 영업직처럼 영어를 자주 쓰는 직군만 제외하면 기업에서 제시한 하한선만 맞추면 된다”고 했다. E회사 관계자는 “직무와 무관한 자격증은 갖고 있더라도 안 내는 게 낫다”며 “하고 싶은 일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자격증을 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SKY 선호?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F사 인사 담당 임원은 “학력 차별을 없애기 위해 자기소개서에 학교를 못 쓰게 하고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 등 노력을 하지만 막상 뽑고 나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의 학생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G사 관계자는 “특정 대학 졸업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다만 하위권 대학을 나왔더라도 서류 필기시험 면접 등 단계별로 학력차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고 그 가능성이 예전보다 높아진 것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학력 물 타기’는 결코 효율적인 취업 대책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었다. A사 관계자는 “유학, 편입, 대학원 진학은 사실 부족한 학력을 부풀리고 자기만족을 위한 시도로 보인다”며 “차라리 그 시간에 전공과목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게 낫다”고 했다.

○ 화장은 지워라


어디선가 본 듯한 모범답안을 내놓는 이들이야말로 ‘탈락 1순위’다. H사 관계자는 “가장 먼저 솎아내는 자기소개서가 취업 사교육 기관에서 컨설팅을 받은 것”이라면서 “대학생으로 가장해서 해당 학원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조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I사 관계자는 “우리는 말 잘하는 아나운서나 글 잘 쓰는 작가를 뽑는 게 아니다”라며 “자신이 기업의 대표가 됐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키울 것인지 성실하게 고민한 흔적이 있는 자기소개서를 찾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했다.

C사 인사 담당자는 “지원 동기에 ‘사회 공헌에 앞장서는 기업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은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돈을 벌어야 사회 공헌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것이다. J사 관계자는 “근본적으로는 적성과 무관하게 대학수학능력 시험 점수에 따라 학교와 전공을 선택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며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정진욱 기자 coolj@donga.com  
▼‘스펙으로 1차 필터링’ 공공연한 비밀… 일부 자격증엔 150만원 넘게 들기도▼

■ 취업 준비생 8명 인터뷰


12일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 20, 30대 취업 준비생들이 모였다. 2시간 남짓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들은 기업들이 최근 내세우는 ‘열린 채용’에 대해 불신감을 드러냈다. “기업들은 학벌이나 토익 점수 등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이른바 ‘스펙’으로 1차 서류전형부터 필터링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입을 모았다.

○ 인재상과 열정을 본다고요?…안 믿어요


S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A 씨(24)는 150만 원짜리 자격증 얘기를 꺼냈다. 그는 “고(高)스펙 지원자들이 몰리는 금융권 취업은 웬만한 스펙으로는 턱도 없다”며 “자격증의 최고봉인 재무설계사 자격증은 시험접수비 등에 들어가는 필수 비용만 최소 150만 원이지만 많은 사람이 돈과 시간을 쏟아 시험을 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A 씨는 “이런 거 딴다고 실무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 싶지만 없으면 면접 볼 기회조차 갖기 힘든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H대 미디어학과 4학년 B 씨(24)는 “자기소개서 특기란에 쓰겠다고 암벽등반까지 다니는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독서나 수영 같은 평범한 것들을 쓰면 대기업 인사담당자의 눈을 잡아끌 수 없기 때문이다.

‘외모도 스펙’이라는 말도 나왔다. A 씨는 “모 그룹은 맏며느리 같은 인상을 좋아한다는 게 정설처럼 돼 있다”며 “이마를 도톰하게 만드는 등 성형수술까지 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전했다.

Y대 경영학과 4학년 C 씨(25)는 스펙의 하나로 꼽히는 인턴 경험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지인이 대기업이나 컨설팅회사에 있으면 억지로라도 인턴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 그 친구는 인턴 경력이 있으니까 이후에 더 인기 있는 인턴 자리를 또 얻게 되죠.”

○ 학벌은 가장 중요한 스펙


‘출신 학교’는 취업 준비생들이 꼽은 가장 중요한 스펙 중 하나였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해 상반기 불합격 통보를 받은 경험이 있는 미취업자 1299명을 대상으로 ‘취업 실패 원인’을 물었더니 29.0%가 ‘출신 학교’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S여대 경영학과 4학년 D 씨(24)는 “국내 모 대기업 인사담당자에게 서울대는 학점 3.5, 연고대생은 3.8까지 괜찮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학점 기준이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실제 아는 인사담당자나 선배들로부터 사석에서 듣는 얘기와 기업이 언론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말하는 내용이 너무 차이가 난다”고 꼬집었다.

K대 경영학과 4학년인 E 씨(26)도 “학교별로 할당량이 있는데, 모 건설회사는 공채에서 특정 학교 출신을 선호한다는 식의 얘기도 파다하다”고 말했다. 현재 전문대를 다니면서 편입 준비를 하는 F 씨(24)는 “겪어 보니 괜찮은 기업은 4년제 대학을 나와야 서류전형이라도 합격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라며 “편입학원 한 달 수강료가 40만 원 정도로 부담이 되지만 동기 5명 중 3명가량은 편입을 준비한다”고 전했다.

○ 눈높이를 낮추라고요?


고졸인 G 씨(31)는 10여 년간 다니던 중소기업을 최근 그만두고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스펙 쌓기 전선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는 “10년을 일했는데도 연봉은 3000만 원대 초반이었고, 비전도 없었다”며 “취업 준비생들에게 뒤늦게 방황하지 말고 무조건 대기업에 가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명문대에 재학 중인 E 씨도 “경험을 쌓고 싶어 중소기업에서 1년 넘게 일해 봤는데 근무 환경이 정말 열악했다”며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은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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