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드라마 캐릭터열전]말기암 신데렐라 연재, 뻔한 비련의 여주인공?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7일 11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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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선고를 받는 순간, 자신에게 닥친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하늘을 원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훨씬 많으리라 믿었는데, 그저 착각일 뿐이었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한탄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자세로 매순간 최선을 다 하게 될 것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남자가 행복한 삶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여인의 향기'(노지설 극본, 박형기 연출)의 이연재(김선아 분)는 그렇게 우리를 찾아와 시한부 인생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할 것을 권했다.

뽀글거리는 파머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고졸 출신의 나이 많은 말단 여직원을 수식하는 외양은 세속적인 고정관념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렇게 틀에 박힌 모습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게다가 여행사 말단 직원이었던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상사의 불합리한 지시나 행동에도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넘겼다. 걸핏하면 해고 운운하는 직장에서 생존을 위한 그녀의 몸부림은 처절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씩씩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기다리는 내일은 없었다.

건강 검진 결과 담낭암 말기라는, 앞으로 길어야 6개월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보다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것이 억울해 울었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무덤에 찾아가 물려줄 것이 없어서 암 같은 것을 물려줬냐고 따지며 대성통곡하는 그녀에게서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누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삶이 힘들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상사의 말이나 행동에도 비굴한 웃음을 보였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참지 않는다. 살아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에게 "야, 이 개자식아!"라고 소리치며 사표를 던진 것은 그동안의 비굴한 삶에 대한 자기 보상이었다.

그리고 여행사 업무로 수행하던 외국 고객의 반지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웠던 재벌가의 딸 임세경(서효림 분)에게 자신이 받은 수모를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돌아서면서 그녀는 자신을 위한 삶의 방법을 깨달았다. 이 순간 이후 그녀는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겨진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어떻게 해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지 모른다.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지독한 자기 연민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일단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실행에 옮긴다.


언젠가 반드시 떠나겠다고 마음먹었던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녀는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꾼다. 운이 좋았던 것이었을까? 여행지에서 그녀는 여행 상품 개발 문제로 출장을 온 본부장 강지욱(이동욱 분)과 만나게 되고, 그렇게 혼자만 설레는 여행을 즐겼다.

전혀 계획에 없던 강지욱 본부장과의 여행은 생각보다 근사했고, 그래서 그녀는 행복했다. 그녀의 '버킷 리스트'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삶을 마감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 20가지를 적으며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지나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후회할 일을 남기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행복한 죽음에 이르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렇게 정리된 그녀의 '버킷 리스트' 첫 번째 항목은 "하루에 한 번씩 엄마를 웃게 만들기!"였다. 철부지 소녀의 감성을 간직한 엄마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엄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누나'의 모습이 보인 까닭도 그래서였다.

치료 불가능한 암 말기 환자가 홀로 남을 엄마를 위해 만들어내는 웃음 속에 눈물이 배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으며, 이렇게 누군가를 위한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의도와 달리 자기 자신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즈음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사랑이 찾아온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직장 내 미혼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강지욱 본부장이 초라한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초등학생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종양내과 의사 채은석(엄기준 분)이 그녀에 대한 짝사랑으로 괴로워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비련의 여인에서 백마 탄 왕자님의 사랑을 받는 신데렐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삶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에 찾아온 사랑으로 그녀는 존재감을 가졌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역설적으로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더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대상화되어 갔다.

자기 연민의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여행 중에 자신을 위로해준 탱고를 배우러 다니지만, 사랑과 정열의 탱고 리듬 속에 빠져들수록 허무함은 더욱 강해지고 그녀는 그렇게 삶의 주체성을 상실해버렸다. 이렇게 그녀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난 행복할 줄 알았으나, 시한부 판정을 선고받은 신데렐라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연재는 여전히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온갖 수모를 무한대로 견뎌내는 여행사의 말단 여직원에서 자기 삶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신데렐라 캐릭터의 또 다른 변주에 지나지 않았다.


웨딩드레스 입어 보기, 첫사랑과의 오해 풀기, 아이돌 스타와 데이트해보기, 하루 동안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보기, 선생님에게 용서 구하기 등 그녀의 '버킷 리스트'에 적힌 내용들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나약한 인간의 자기 성찰의 시선 대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조차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고착돼버린 비련의 신데렐라를 향한 자기 연민의 시선만이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이다.

연민의 시선은 이연재를 옭아매는 올가미와 같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그녀가 기적처럼 살아나 강지욱과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녀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기보다 불행한 신데렐라를 상상해본 적 없는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싹 튼 것이다.

신데렐라가 불치병으로 죽어간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난 신데렐라는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고행과 시련 끝에 신데렐라가 왕자님을 만난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그 이후의 상황은 필요 없다.

그래서 이연재와 강지욱의 행복한 결말을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죽어가고 있으며, 이건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심 삶에 대해 무심한 듯하지만, 남겨진 시간 동안 원하는 모든 것을 하겠다며 '버킷 리스트'를 실행에 옮기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은 지나치게 과잉되어 있다. 그녀를 사랑하는 강지욱과 채은석은 물론 심지어 한 때 연적이었던 임세경마저 그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감정 과잉의 상황이 현실감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이연재에게 찾아온 혹은 뒤늦게 깨달은 사랑에서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운 것도 그래서이다. 오히려 간암 투병 중에도 욕심이라 말 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을 갈망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놓으려 하지 않았던 양희주(신지수 분)의 죽음이 슬픔의 근원을 자극한 것과 비교해보면 이연재를 향한 연민의 시선이 얼마나 과잉되어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남은 삶의 시간을 정리한다는 것은 실제 겪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일 것이다. '여인의 향기'의 이연재는 그 고통의 시간을 우리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삶은 온통 비극적이되 낭만적인 사랑의 수사학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또한 그녀에 대한 과잉된 연민의 감정으로 인해 죽음을 통한 삶의 의미 성찰은 좀처럼 쉽지 않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나약한 인간의 자기 성찰을 동반하지 못한 그녀, 이연재는 이렇게 평범한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머물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지난 여름 우리 곁에 머물렀던 그녀의 운명 아니었을까?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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