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으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의 전력 공급과 비상용 발전기 가동이 중단되고, 냉각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원자로 노심용해가 일어난다. 결국 방사선이 유출되고 주민 수만 명이 대피한다."
최근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와 소름끼칠 정도로 비슷하지만, 사실은 이미 2003년 하마오카(浜岡) 원전 상대로 소송을 냈던 변호사들이 제시한 사고 시나리오다.
일본에서 지난 수십 년간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 문제를 제기하며 소수 시민운동가·전문가들이 벌여온 법정투쟁 사례들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고 16일(현지시각)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1976년 석유파동 이후 원전에 집중 투자를 시작한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들은 활성화된 단층선 위에는 원전을 짓지 않을 것이라고 대중을 안심시켜 왔다.
그러나 이후 지진학의 발전으로 원전 인근에서 활성 단층선들이 새로이 속속 발견돼 원전 안전성에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부터 원전과 관련해 주민과 변호사·과학자 등 전문가들이 전력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주요 소송만 14건에 이른다.
이들 재판 과정을 통해 우선 두드러지는 것은 전력회사들이 비용이 많이 드는 시설 개·보수를 피하기 위해 활성 단층선 등에 따른 지진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거나 은폐했다는 사실이다.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니가타(新潟)현 가시와자키카리와(柏崎刈羽) 원전의 경우 주민들이 원전 인근에 위험한 활성 단층선이 있다며 소송을 냈으나, 도쿄고등법원은 그러한 단층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2005년 원고 패소 판결했다.
그러나 이후 2007년에 규모 6.8의 강진으로 원전에 화재가 일어나 방사선이 유출되는 등 피해가 발생한 뒤에야 도쿄전력은 활성 단층선의 존재를 인정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원전 안전성 관련 소송 중 원고 승소는 단 두 차례에 그쳤고 이들마저 모두 상급 법원에서 뒤집혔다는 점.
이 같은 사실은 원전을 지지하는 정부, 원자력 규제당국, 전력회사들의 '유착 문화'가 법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는 많은 일본 국민들의 믿음을 굳게 만들고 있다고 NYT는 평가했다.
한 예로 이시카와(石川)현 시카(志賀) 원전 주민들이 낸 소송에서 고등법원은 해당 원전이 지진 관련 신규 안전기준을 충족하고 있다며 2009년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이 안전기준은 전력회사들과 연관돼 있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 위원회에서 정해진 것이었다.
또 하마오카 원전 가동 중단을 요구하는 주민 소송에서도 지방법원은 원전 찬성론자인 마다라메 하루키(班目春樹) 현 원자력안전위원장이 비상용 발전기 2기의 동시 가동 중단 가능성을 일축한 증언에 크게 의존해 2007년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마다라메 교수는 최근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처럼 원전 상대 법정 투쟁이 번번이 패배로 끝남에 따라 외로이 투쟁을 벌여온 소수 운동가·전문가들은 주변의 따돌림 등으로 점차 숫자가 줄어들면서 거의 대중으로부터 무시당해왔으나, 이제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로 각광받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하마오카 원전 소송의 원고 대표를 맡았던 가이도 유이치 변호사는 2007년 지방법원 판결에서 승소했으면 전국 원전의 지진·쓰나미 대비 안전기준이 강화됐을 것이라며 "이번(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