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배우의 살아있는 전설, 그녀의 귀환 ●'칸'과 '이창동'이 택한 두 여우, 그리고 영원한 영화배우
그녀가 돌아왔다. 그것도 단지 돌아온 정도가 아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동시대에 활동했던 여배우들이 모두 화석처럼 박제가 되어버리고도 남은 2010년, 데뷔 44년 만에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서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16년 만에 출연한 영화 '시'에서의,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닌 다소 엉뚱한 할머니 역할을 통해서다.
이미 거장이 되어버린 이창동 감독은 영화 '시'의 메이킹 필름에서, 작품을 기획하던 단계부터 그녀와 그녀의 본명 외에 다른 생각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윤정희. 그녀는 자신의 본명 그대로인 '미자'라는 이름의 생활보조금을 받아 살면서 딸이 맡기고 간 10대 외손자까지 키우는 60대 할머니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이 할머니는 그런 와중에도 '꽃'을 사랑하고 '시'를 쓰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우연히 엄청난 사건에 휘말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게 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의 참담한 이면을 보게 된 주인공. 단 한 번도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던 할머니 '미자'는 '시'를 통해 세상에 대한 외침을 감행하게 된다. 미자의 모습을 통해 섬세하면서도 당당한 '영화배우 윤정희'의 모습이 온전히 은막에 투영된다.
2007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자배우상을 수상한 전도연. 그녀는 윤정희와 닮은 꼴이 많은 배우다.(로이터) 이창동과 칸이 선택한 두 명의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 윤정희와 전도연.
결과는 아직 예측할 수 없지만 윤정희, 그녀는 이미 칸 국제영화제 사상 최고령 여우주연상 후보가 됐다. 그리고 이미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 여배우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셈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를 누볐던 은막의 여왕!
1944년 광주에서 태어난 윤정희(본명 손미자)는 22세이던 1966년,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보게 된 신인 배우 오디션에서 무려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다. 그리고 그해 영화 '청춘극장'의 여주인공으로 은막에 데뷔했다.
연간 제작편수가 200여 편이 넘을 정도로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던 1960년대. 당시 대부분의 여배우가 조역이나 단역부터 시작했던 것에 반해 그녀는 첫 영화부터 주연을 꿰찼고 그해 대종상 신인여우상까지 수상, 말 그대로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그 뒤 윤정희는 문희, 남정임과 함께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면서 7년간 300여 편의 영화를 찍었으니(한국영상자료원 공식 집계 264편), 이는 1년에 최소 40편, 즉 1주일에 1편 꼴로 새로운 '윤정희 영화'가 나온 셈이 된다. 지금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물량이다.
심할 때는 3편을 하루에 찍기도 했을 정도로 엄청난 강행군. 와중에도 그녀는 작품 선정에 신중해 '안개' '분례기' '석화촌' '무녀도' 등 그녀의 출연작은 한국영화의 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윤정희는 동양적이면서도 청초하고 단아한 이미지로 당시에 한번쯤 그녀를 흠모하지 않은 남성이 없었을 정도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한국 최초의 석사 출신 여배우라는 지적이고 성실한 배우의 지위를 구축, 한국 영화 속 여배우의 캐릭터를 다양화 하면서,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24회를 수상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정말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로서, 그녀만큼 동시에 많은 것을 한꺼번에 거머쥔 여배우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진정한 은막의 여왕이었다.
1977년 프랑스에서 결혼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동아일보 자료사진) ▶용기와 도전 정신으로 떠난 프랑스 유학 그리고 결혼
인기 절정이던 1972년, 그녀는 홀연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이를 놓고 당시 팬과 언론 사이에서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5년 정도만 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유학갈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꿈이 컸다. 이 꿈은 정확히 7년을 집중적으로 활동을 하고 난 뒤인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당시 신상옥 감독과 '이별' 촬영 헌팅을 위해 파리에 간 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영화의 본고장'인 프랑스 유학으로 이어지게 된 것.
파리에서 영화 공부를 하면서 그녀는 영화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평생의 동반자인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만나 결혼도 했다.
화려한 데뷔, 왕성한 연기 활동, 인기 절정에서의 돌연한 프랑스 유학, 백건우와의 결혼, 납북(拉北) 미수사건(1977년) 등 그녀의 움직임은 늘 화제가 되었지만, 한국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접고 파리로 건너간 그녀는 영화학도이자, 한 남자의 소박한 아내로 그렇게 일상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영화에 대한 끈을 놓은 적이 없었다.
▶제가 언제 영화판을 떠난 적이 있던가요?
끊임없이 영화에 대해 공부를 한 유학 생활도 그렇지만, 결혼 후에도 꾸준히 시나리오를 받아보면서 작품을 선별, 정말 맘에 드는 좋은 작품이 있으면 휴학하고 귀국을 하는 방식으로 총 20여 편의 영화를 찍기도 했다.
이 가운데 1994년 영화 '만무방'으로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10년 넘게 각종 국내외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해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세계 영화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만무방' 이후 '시'로 돌아오기까지, 그녀는 절대 은퇴 후 컴백이라는 예정된 수순을 밟은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에 드는 적합한 작품이 없었을 뿐이었다.
# 그녀에 대한 에피소드
필자는 지난해에, '죽음까지 함께 하는 노부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동행'이란 영화를 준비하면서 '시'를 준비하는 윤정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미 제작진은 여자 주인공으로 그녀를 캐스팅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파리와 런던으로 공수하고 있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인 부군의 매니저를 겸한 동반자로 1년에 절반은 전 세계를 오가는 연주 여행으로 보내는데, 당시에 런던 공연이 잡혀 있는 상황이라 시나리오가 도착하는 시점을 맞추기 위해 양쪽으로 모두 보낸 것이다.
시나리오에 만족한 그녀와 준비 중인 영화에 대해 몇 차례 전화로 의견을 나눈 이후 귀국 첫날 여의도의 모 커피숍에 만난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그녀는 커피숍 한 쪽에서 단아하게 앉아 잡지를 읽고 있었고, 이 때 만난 그녀는 6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여전히 곱고 아름다운 자태에 소녀 같은 목소리로 유쾌하게, 까마득하게 어린-그래서 바짝 긴장하고 얼어 있었던-후배 제작자와 감독을 편안히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때 본 그녀는 여배우로서 자긍심은 넘치지만 자만심은 없었고, 위엄은 있으나 권위적이지 않았으며, 활기가 넘쳤으나 품위는 잃지 않았고, 수수한 옷차림에도 아름다움은 넘쳐흘렀다.
이후로도 그녀는 정확히 매일 아침 10시가 되면, 작품에 대해 간밤에 고민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의견을 나누기 위해 직접 전화를 할 정도로, 그 어떤 젊고 어린 배우들보다 더 작품에 대한 성의와 열정을 보였다.
상대역을 맡을 배우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본인의 데뷔작부터 함께 했던 동시대 최고의 남자 배우 '신성일'을 강력 추천한 것이다.
이 때에 알게 된 사실 하나!
두 사람은 지금까지 정확히 99편의 영화를 함께 했고, 100편을 채울 수 있는 적당한 영화를 찾고 있었다. 따라서 내가 준비하던 영화는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서로 간에 너무도 좋은 기회였다. 본래는 '시' 촬영이 끝나고 바로 이어서 출연을 하려 했었으나, 그 작품은 너무 안타깝게도, 투자 유치의 난항으로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 "배우로 인생을 마치겠습니다"
시간이 흘러, 필자는 영화 '시'를 통해 다시 윤정희를 만나게 됐다. 혹자는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옛 모습과 비교하며 나이가 들고 늙어 버린 현재의 그녀 모습에 세월의 무상함과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레타 가르보보다는 변하는 모습까지 팬들에게 선사했던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살 거예요."
영화 속 그녀는 짧은 만남 속에서 보았던 실제의 그녀 모습과 정말 너무도 닮아 있었고,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것'같은 세월과 연륜을 담은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지켜보는 이들에게 처연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혹자는 '이창동 감독 최고의 걸작'이라 추천하기도 한 영화 '시'를 통해 그녀가 얼마나 더 화려한 모습으로 도약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또 그녀가 언제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표현대로 한가지는 확실해졌다.
"윤정희가 누구인가요? 바로 영화배우 윤정희죠. 그러니까 저는 죽을 때까지 영화 곁에 있을 거예요."
앞으로 70대가 되도, 90대가 되도 끊임없이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을 은막에서 만날 수 있기를 팬과 영화 애호가의 입장에서 간절해 바래본다.
이처럼 독보적인 그녀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후배 여배우를 꼽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영화' '이창동' '프랑스' '칸' 등의 키워드를 나열해 보면 누구라도 무릎을 치고 떠올릴만한 적임자가 있다. 전도연이 바로 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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