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위기 유럽 4개국 지금은…]<下>스페인과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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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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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짓다만 공공주택 즐비… 伊 “보험 깨 생활”13% 급증
나라 곳간 빈 스페인
“재정 부족” 공사중단 속출
쇼핑센터 40% 개장 못해

교외로 갈수록 열악한 伊
도로 좁고 지하철 자주 고장
투자 못해 기반시설 엉망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장사가 가장 잘되는 재래시장’으로 꼽히는 마라비아 시장. 부활절 연휴를 앞둔 지난달 29일 오후였지만 과거에 비해 손님이 많이 줄었다. 3, 4년 전만 해도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마드리드=박형준 기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장사가 가장 잘되는 재래시장’으로 꼽히는 마라비아 시장. 부활절 연휴를 앞둔 지난달 29일 오후였지만 과거에 비해 손님이 많이 줄었다. 3, 4년 전만 해도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마드리드=박형준 기자
지난달 30일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부동산 중개기업인 로안 본사. 기자가 “요즘 경기가 어떠냐”고 묻자 루이스 로메 이사는 붉은 칠을 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2005∼2009년 부동산 거래현황을 분기별로 정리한 표였다. 전 분기보다 성장하면 녹색으로, 감소하면 빨간색으로 칠했는데 2007년 3분기부터는 온통 빨간색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경제위기는 2008년 건설경기가 무너지면서 시작됐다”며 “건설 붐이 꺼질 때 미국발(發) 금융위기를, 지난해 말에는 재정위기를 맞아 스페인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2007년 건설된 주택과 사무실은 90만 개였지만 지난해엔 15만 개로 줄었다. 부동산 중개기업인 로안의 일거리도 그만큼 사라졌다.

하지만 로메 이사는 “스페인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그리스나 포르투갈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기자가 인터뷰 중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라는 단어를 쓰자 그는 “그 용어는 적절치 않으니 쓰지 말아 달라”고 정중히 요청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현지 취재한 결과 두 나라는 재정위기에서 탈출할 묘안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그리스와 비교하면 경제 규모나 기초체력이 훨씬 낫다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의 일상생활에는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 곳간이 비어 멈춰 선 공공사업들



마드리드 시내에서 승용차로 30분 정도 달려 도착한 라스로사스 시. 마드리드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다. 라스로사스 주정부는 2007년부터 젊은이들에게 시가보다 싸게 공급하는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 건설 공사는 절반만 진행된 채 중단된 상태다. 일부 대지는 용지 조성조차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다. 도로변에 물과 전기, 가로등을 제어하기 위한 시설만 일정 간격으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공사가 중단된 것은 재정 부족으로 공사가 원활한 진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다 지어봐야 입주 신청자가 없을 것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부동산 자문기관인 아기레 뉴만의 시장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스페인에서 개장할 예정이었던 25개의 쇼핑센터 중 15개만 문을 열었다. 아기레 뉴만은 “경제위기와 재정위기가 겹치면서 소비위축, 투자자금 확보난 등으로 향후 2년간 쇼핑센터 건립이 축소되거나 취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달 29일 마드리드 중심부에 위치한 최대 재래시장인 마라비아 시장. 부활절 연휴에 먹을 음식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제법 활기가 느껴졌다. 과일가게 상인에게 “손님이 많은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상인은 손사래를 쳤다. 그는 “2년 전 같으면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붐볐지만 오늘은 고만고만하지 않냐”며 “건설경기가 좋지 않아 중남미 노동자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손님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마드리드 국제공항 인근의 가전제품 쇼핑몰은 평일 오후였지만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매출 신장에는 남모를 비밀이 숨어 있었다. 가전업체인 메나헤 데 오가르의 카를로스 마르티네스 매니저는 “정부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7월부터 부가세를 2% 올리는데 그 전에 제품을 사려는 수요가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교외로 갈수록 열악한 이탈리아

이탈리아 밀라노 시 외곽 지역에는 재정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된 공공 공사현장이 여러 군데 있다. 시에서 짓던 서민용 주거시설은 재정 부족으로 10년째 공사를 멈췄고, 이제는 동네 흉물로 전락했다. 밀라노=이세형 기자
이탈리아 밀라노 시 외곽 지역에는 재정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된 공공 공사현장이 여러 군데 있다. 시에서 짓던 서민용 주거시설은 재정 부족으로 10년째 공사를 멈췄고, 이제는 동네 흉물로 전락했다. 밀라노=이세형 기자
지난달 24일 이탈리아의 경제도시인 밀라노 시 중심가 두오모 성당 근처 쇼핑센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베네통 매장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매장의 매니저는 “매출이나 수입에 변화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중심가만 놓고 보면 이탈리아는 재정위기의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교외로 나가거나 이탈리아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같은 날 밀라노 시의 서민층 거주지역인 보비사. 이곳에는 10년 전부터 방치돼 온 ‘유명한’ 공사 현장이 있다. 원래 밀라노 시에서 학생과 노인을 대상으로 한 주거시설을 만들려고 했지만 공사비가 부족해 철근으로 건물의 뼈대만 만들고 지금까지 손을 쓰지 못한 것이다.

철근은 오래돼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또 건물 주변에는 건설자재와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집시와 거지들이 단체로 거주하면서 우범지역이 되기도 했지만 주민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지속적으로 신고해 경찰이 이들을 몰아냈다고 한다.

정부가 재정 부족으로 공공투자를 아끼다 보니 사회기반시설도 계속 열악해졌다.

다국적 제약회사인 UCB의 이탈리아 법인에서 근무 중인 파비오 판토니 씨(42)는 밀라노 지하철이 자주 고장 나거나 지연돼 매일 오토바이로 출근한다. 대중교통 사정이 안 좋다 보니 좁은 도로에 차량이 몰려 오토바이가 아니면 출근시간에 맞추질 못한다. 판토니 씨는 “시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관리가 안 되는 바람에 기본적인 사회 인프라마저 엉망”이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발전했고 소득수준도 높은 밀라노가 이 정도인데 다른 곳은 어떻겠느냐”고 반문했다.

최근 밀라노에서 유행하는 말 중 하나는 ‘밀라노가 이 정도면 남부(남쪽 이탈리아)는 오죽하겠느냐’는 것이다. 실제 남부지역의 보험 해약률이 크게 늘고 있는 데서 경제난이 더 심각함을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보험협회 홍보팀의 이포리티 파비오 씨는 “지난해 이탈리아 보험 해약률이 전년보다 13% 정도 상승했는데 남부지역에서 특히 높았다”고 전했다.

○ 보이지 않는 터널의 끝


세계 경제가 회복세에 접어들었지만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올해 경제사정은 밝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일 이탈리아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올해 1월보다 0.2%포인트 낮춘 0.8%로 발표했다. 스페인에 대해선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올해 마이너스 성장(―0.4%)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재정이 부실하다 보니 정부가 경제회복을 위해 투입할 재정적인 여력도 충분하지 않다.

마드리드 시내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후안 산체스 씨(42)는 “정부는 올해 하반기부터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스페인 사람은 거의 없다”며 “직장인들이 회사가 지불하는 택시비를 자기 주머니에 넣고 버스를 타고 다닐 정도니 내년에 경기가 회복돼도 감지덕지”라고 말했다.

밀라노=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마드리드·라스로사스=박형준 기자 ovesong@donga.com

▼PIGS 다음은 영국과 일본?
GDP적자 英 12.6%-日 7.4%… 세수 줄어 고민▼


지난달 5일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는 ‘영국 재정적자 해결책’이라는 주제로 특강이 열렸다. 영국의 재정위기가 남유럽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들에 못지않다는 우려감 때문인지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앨런 매닝 LSE 경제학과 교수는 “영국은 현재 전시를 제외하고 사상 최대의 재정적자에 허덕이면서 경기후퇴에 빠져들고 있다”며 “영국 경제에 대한 국내외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내놓은 해법은 정부 지출을 과감히 줄이고 광범위하게 세금 인상을 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5월 의원 선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 대책들을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발표를 끝냈다.

PIGS 국가들에 이어 재정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있는 국가로 영국과 일본을 거론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일본과 영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수지 비율은 각각 7.4%와 12.6% 적자였다. 그리스(―12.7%) 포르투갈(―6.7%) 스페인(―9.6%) 이탈리아(―5.5%)와 비교할 때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수치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역시 심각하다. 일본은 189.3%로 OECD 평균(90.0%)을 훌쩍 뛰어넘어 회원국 중 가장 높았다. 영국은 세수(稅收)가 연중 가장 많은 달인 1월마저 1993년 이래 처음으로 43억 파운드 재정적자를 기록해 올해 재정적자는 더욱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두 나라의 재정적자가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 양국 정부의 고민이다.

영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은행권에 대한 구제금융, 경기부양책 시행, 경기침체로 인한 세수 감소 등으로 재정적자와 부채가 크게 늘었다. 일본도 1990년대 버블이 꺼진 뒤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실시하면서 재정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심각한 고령화에 따른 사회복지 지출의 확대와 경제활력 저하, 경기침체로 인한 세수부족까지 겹친 상태다.

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일본의 국가부채 규모와 이로 인한 이자 지출 비용은 전체적인 정부 지출에도 경직성을 초래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적극적인 해결 노력이 나오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런던=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밀라노=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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