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有錢大罪

  • 입력 2009년 8월 4일 20시 02분


왜 같은 잘못이라도 ‘있는 사람’이 저지르면 더 고약해 보일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앨리슨 프래게일 교수가 실험을 해봤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백인 여성과 멕시코 이민자 여성이 같은 액수의 세금을 탈루했다면? “잘못을 알고도 저질렀을 백인 여성 죄가 더 크다”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우리나라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속설이 있지만 사람 심리는 거꾸로인 셈이다.

▷“똑같은 신호 위반이나 과속을 했을 때 돈 많이 버는 사람은 범칙금을 더 내고 서민은 조금만 내도록 할 수 없느냐.”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말 ‘토론형 국무회의’에서 화두를 던졌다. ‘매일 차 한 대 운전해 바쁘게 사는 사람’과 ‘돈 많아 놀러 다니는 사람’이 똑같은 범칙금을 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었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유전대죄(有錢大罪)의 시대가 올 것인가.

▷행위자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벌금을 차등 부과하는 방식을 일수벌금형 제도라고 한다. 부자나 서민이나 똑같은 벌금을 물면 서민이 더 고통 받으므로 희생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논리에서 나왔다. 2002년 핀란드의 노키아 부사장 안시 반요키는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시속 50km 제한도로에서 75km로 냅다 달리다 11만6000유로(현 환율로 약 2억 원) 벌금형을 받았다. 그의 연봉이 1400만 유로였다. 이런 차등제는 1921년 핀란드가 처음 도입한 이래 스웨덴 덴마크 독일 프랑스 헝가리 포르투갈 등 유럽에서 꽤 시행된다.

▷반면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영국은 1992년 시범실시하다 폐지했고 미국은 1988년부터 일부 지역에서만 시험 중이다. 이기헌 명지대 교수는 ‘일수벌금형 제도에 대한 고찰’ 논문에서 “행위자의 경제적 사정의 정확한 조사에 대한 국민적 신뢰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처럼 소득 파악이 투명하지 않은 나라에선 괜히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만 추락시킬 우려가 크다. 형평성 원칙에 위배될 수 있고,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 ‘친(親)서민’이 기초질서 교란으로 이어져 국가적 비용이 훨씬 커질 가능성도 있다. 대통령의 ‘포퓰리즘 의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만만찮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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