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14>

  • 입력 2009년 6월 14일 13시 18분


제24장 마각

114회

확인은 쓰라리지만, 반복해서 실수하지 않으려면 찢어진 살갗에 소금을 뿌린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지랄 맞습니다. 정말!"

지하 계단을 내려서며 앨리스가 욕을 해댔다. 뒤따르던 석범은 말이 없었다. 넷이서 2049년 새해맞이를 했는데, 이제 둘 뿐이다. 이유가 어떻든지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지병식이 성창수를, 은석범이 지병식을! 이런 식이라면 앨리스가 석범을 죽일 차례다.

원칙적으로 보안청 요원은 동료의 주거지를 알 수 없다. 연봉이 다른 청보다 3배 이상이기 때문에 편히 잘 지내겠거니 추측할 뿐이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지하 3층 쪽방이 병식의 보금자리였다. 석범은 무릎을 접었다 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쏟아 부은 걸까?

덜컥.

문이 열렸다. 앨리스와 석범의 얼굴로 습한 기운이 확 밀려들었다. 석범은 병식의 축 늘어진 볼을 떠올렸다. 사람 좋은 넉넉한 웃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앨리스가 흘끔 고개를 돌렸다.

"재작년 겨울 이혼을 했더군요. 부인과 세 딸은 북경특별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망 소식을 전했지만 모든 사후 절차를 보안청에 일임하겠다는 답이 왔습니다.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뒤늦은 조사결과였다.

웃고만 다녀서 가정도 개인도 행복이 넘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장 큰 아픔을 홀로 견뎠던 것이다.

"그래도 지 선배는 꼬박꼬박 북경으로 생활비를 보냈더군요. 형사 월급보다 열 배 더 많은 금액입니다."

앨리스는 병식을 아직도 '지 선배'라고 불렀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을 아직도 배려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오랜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려운 걸까.

"자, 들어가시죠."

앨리스가 힘껏 방문을 열어젖혔다.

"엇!"

앨리스와 석범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뜻밖의 광경에 감탄사를 뱉었다.

아내 대용 로봇 달링 4호가 두 팔을 포박당한 채 문을 향해 서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비롯한 세 딸이 북경으로 떠났으니, 병식이 아내 대용 로봇을 사서 쓸 상황은 충분했다. 보통 아내 대용 로봇은 문이 열리자마자 반갑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병식은 달링 4호를 꼼짝도 못하게 묶어놓은 것이다.

앨리스가 로봇의 목 뒤에 붙은 배터리 양을 확인했다.

"7월 1일, 성 선배가 죽던 날부턴 아예 배터리를 끊었습니다."

마지막 양심은 남았던 걸까. 파트너인 성창수를 살해한 날부터는 아내 대용 로봇과 사랑을 나누지 않은 것이다.

"일련번호를 확인해봐. 언제 어디서 샀는지도."

석범이 짧게 명령했다.

앨리스가 파워스마트수첩을 열고, 보안청 중앙 컴퓨터를 경유하여 아내 대용 로봇 회사인 <둘이서>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고객의 사생활 보호를 위하여 로봇 구입자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각 로봇이 생산 공장에서 어떤 가게로 이송되어 언제 팔렸는가는 기록에 남았다.

"이 로봇은 35444번이군요. 으, 이상한데요."

"뭐가?"

"변주민의 달링 4호가 35445번입니다. 그리고 35440부터 35445까지 다섯 대의 로봇은 5월 1일 남대문 대리점으로 같이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35445번이 6월 1일 1시 17분, 35444번이 같은 날 1시 18분에 판매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변주민과 지 선배가 같은 날 1분 사이에 같은 가게에서 달링 4호를 구입했다는 말입니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 이곳에서 만났겠군요."

"두 사람이 남대문 대리점에서 처음 만나진 않은 것 같은데……."

석범이 말끝을 흐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남 형사! 내 눈에는 그 증거가 두 가지 정도 보여."

"증거라고요? 뭡니까, 검사님?"

"맞춰봐. 그냥 가르쳐주면 재미없잖아."

앨리스가 눅눅한 방을 천천히 훑었다. 그러나 석범이 원하는 답을 발견하지 못한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모르겠습니다."

석범이 오른손을 들어 달링 4호를 가리켰다. 앨리스가 손끝을 따라 달링 4호를 쳐다보다가 짜증을 냈다.

"씨, 숨은그림찾기도 아니고…… 대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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