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사승]뉴스 산업, 길을 잃다

  • 입력 2009년 5월 30일 02시 58분


뉴스양이 줄면 정부 부패가 더 심해진다는 연구가 있다. 부패와 인구당 신문구독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니 무료보급률이 높아질수록 부패지수가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감시하는 눈이 많으면 정부가 나쁜 짓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재미있는 점은 무료보급률과 부패 가능성이 반비례한다는 발견이다. 신문의 사회적 기능을 평가하지만 돈은 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의 빤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신문 역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독자가 신문의 값어치대로 가격을 지불한 적은 없었다. 공공재인 신문의 비즈니스는 그만큼 비논리적이다. 지금은 그나마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생산-소비 메커니즘 깨지고 있어

논리에 맞지 않는 신문비즈니스는 어떻게 지속됐을까. 두 가지로 해결했다. 첫째는 정치적 보조를 받는 방법이었다. 정파성을 공공연히 내세우면서 정당으로부터 보조를 받았다. 정치 경제 등 경성뉴스에 집중하는 유럽의 많은 신문이 살아온 방식이다. 또 다른 방법은 광고다. 신문 보는 사람의 눈을 광고에 팔아서 재원을 마련했다. 근대 신문의 대표적 형태이자 대중지를 등장시킨 미국식 해결책이다. 주목할 사실은 둘 다 신문 산업이 산업혁명시대의 비즈니스모델 유산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으므로 가능했다는 점이다.

신문기업은 거대한 자본을 투자하지 않으면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윤전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높은 수준의 고정투자와, 복잡하게 구축된 생산관행을 무기로 내세우는 비즈니스모델이다. 대자본이 투입되는 거대 설비, 정치나 유명 연예인과 같은 소수 특정계층의 이슈,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이름 하여 산업모델이라고 한다. 경쟁자들은 이런 구조의 뉴스시장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신문기업은 자연스럽게 시장의 독점력을 구가할 수 있었다. 경쟁은 신문기업 그들만의 리그에 한정됐다. 신문의 이런 논리는 방송뉴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더 비싼 장비, 더 복잡한 생산방식, 더 제한적인 뉴스이슈를 생각하면 오히려 산업모델을 확대 강화한다고 할 수 있다.

뉴스산업이 겪는 작금의 혼란은 이 모델이 깨어짐으로써 초래된다. 누구나 큰돈 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딱 맞춰 뉴스를 생산할 수 있다. 구체제 붕괴를 체감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감감하기만 하다. 기존 비즈니스모델을 대체할 모델이 보이면 고민할 점이 없겠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큰 변화는 눈에 띄지 않지만 작은 변화는 통제 불능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대체할 방법이 뾰족히 없는 상황에서 비즈니스는 빠르게 무너지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외국선 각종 생존실험… 우린 손놔

‘네트워크의 부’라는 책을 통해 네트워크 경제를 주창한 하버드 로스쿨의 요카이 벤클러 교수나 디지털 테크놀로지 전문가인 뉴욕대의 클레이 서키 교수는 한마디로 산업모델의 유효성이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대체할 모델에 대해 서키 교수는 아직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대신 실험이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벤클러 교수는 뉴욕타임스나 BBC처럼 오프라인과 온라인 양쪽에서 거대한 독자시장을 가진 메이저 미디어가 지금의 비즈니스방식을 유지하며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물론 메이저의 존재방식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 이머징 모델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광고도 규모에만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를 세분해야 광고주들이 나설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독자 타기팅 전략을 추진할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타협하면서 살아나갈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마이너 미디어다. 진행 중인 실험들은 이들을 겨냥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실험은 힘없는 마이너를 분화의 블랙홀로 몰아넣을 것이다. 실험을 통과하면 살아남고 아니면 사라진다. 현재까지의 실험만 놓고 보면 방향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개방이다. 뉴스생산 공정의 문을 열어 놓고 다른 전문가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참여저널리즘, 협력저널리즘으로 불리는 개방형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것인데 어느 정도 알려진 실험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극적인 실험이다. 이윤창출의 욕망을 포기하고 비영리 모델을 택하도록 권한다. 박애주의적 기구가 운영재원을 제공하거나 시민이 십시일반 성금으로 이들이 원하는 이슈를 취재하거나, 영리적 비즈니스를 하되 이익을 비영리 재단에 이전하거나, 비영리 기구가 자신의 영역과 관련된 이슈를 직접 뉴스로 생산하거나, 아니면 아주 극단적으로 정부재원으로 뉴스를 생산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이 실험은 상상하는 만큼 다양하다. 이 모두 저널리즘은 본질적으로 공공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실험이다. 언제든지 삐뚤어질 수 있는 인간의 불완전성이나 지속적 생산의 불투명성을 해결해야 하지만 어쨌건 실험의 의미는 중요하다. 시장이 먹여 살릴 수 있는 기업의 수는 제한적이다. 파이를 나눠 갖지 못한 기업은 생존근거를 시장 바깥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실험도 없고 상상도 하지 않을까.

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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