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상인]소음을 줄이고 볼륨을 낮추자

  • 입력 2009년 3월 31일 19시 53분


얼마 전 환경부는 전국 33개 주요 도시의 소음실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부산 대구 인천 춘천 수원 등지의 주거지역 평균 소음도는 밤낮 모두 환경기준을 초과했다. 서울도 결코 무사하지 않아서 전용 주거지역과 도로변 주거지역의 소음은 주야(晝夜) 공히 불합격점이었다. 일반 주거지역의 야간 소음도는 최근 49dB(데시벨)까지 높아졌다는데 50dB을 넘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수면에 지장을 받는다.

워낙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생명체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무수히 많은 소리가 새로 출현했다. 우선 기계문명의 도래에 따른 인공음의 증가가 있었다. 주로 공장이나 차량 등에서 발생하는 소음공해 탓이다. 여기에 가세한 것이 소리 복제기술의 발명과 발전이다. 오리지널 자연음의 특징은 태어나고 성장하며 또한 죽어가는 것이다. 종달새가 우짖는 소리나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생각해 보라. 인간의 목소리 또한 원래는 들릴 수 있는 범위까지만 한 차례 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소리는 얼마든지 저장 재생 및 증폭 가능한 물질이 되었다.

자연의 소켓으로부터 독립된 소리는 그것이 처음 생성된 시공간 특유의 의미나 분위기와 차츰 분리된다. 과거의 소리를 지금 생생하게 들을 수 있고 이역(異域) 땅의 소리도 지척에서인 양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즘 사람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가 아닌, 말하자면 초현실적 세계에 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것이 문명이라면 문명이고 진보라면 진보다. 하지만 이로 인해 현대인들은 음분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 캐나다의 음경(音景·soundscape) 연구가 셰이퍼의 생각이다.

폭력·고문에 가까운 확성기 문화

언필칭 압축적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이 우리나라인지라 음경의 피폐화 역시 세계적 수준이다. 변명의 여지없이 목하 대한민국은 온 나라가 소음 천지다. 산업소음도 물론 그렇지만 생활소음은 더욱 심하다. 음식점이나 주유소 헬스장 시장 마트 등에서 무시(無時)로 쿵쾅거리는 음악소리는 사실상 폭력이다. 버스나 택시운전사가 마구 틀어대는 라디오 소리 또한 어쩌면 고문이다. 많은 공공장소에서 왕왕대는 텔레비전 소리 역시 다분히 일방적이다. 하긴 방송 자체가 통째 소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방송 언어는 두서없이 빠르고 톤도 턱없이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덩달아 커지는 것이 일상의 음성이다. 지하철 반대편에서도 들리는 휴대전화 통화에다가 식사는 분명히 3인분인데 목소리는 예사로 10인분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소음이 집회나 시위의 도구로 정착한 것도 우리나라의 유별난 풍경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 셋만 모이면 마이크를 찾고 다섯만 모이면 확성기를 드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축구든 야구든 중계방송조차 이제는 무리를 짓고 함성을 지르며 시청하길 즐긴다.

시각(視覺)에는 시각(視角)과 시선(視線)이 있지만 청각에는 그런 것이 없다. 후각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비라도 된다. 그러나 청각은 도대체 피하거나 숨을 데가 없다. 그런 만큼 개인적 차원에서 소음사회가 강요하는 고통과 피해는 너무나 전체적이고 직접적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회적 차원에 놓여 있다. 시나브로 우리 사회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고 아무 말도 듣지 않는 상황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독일의 의사이자 작가인 피카르트의 말마따나 끊임없는 소음의 세계가 애초에 청각세계 자체를 존재하게 한 공백을 뒤덮어 버린 결과다. 침묵이야말로 모든 말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인데도 말이다.

소리의 양과 질은 문명화 척도

소음과 고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말의 생성도 어렵지만 경청(傾聽)은 더욱 힘들다. 덩달아 글도 점차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변해간다. 경청이 없는 사회에서 제대로 된 상호이해나 토론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다 보니 지금 우리 사회는 말 같지 않는 말이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그것조차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처지에 빠져 있다. 침묵의 소멸과 정적(靜寂)의 부재는 말의 경화(硬化)와 대화의 경색(梗塞)을 낳고 궁극적으로 폭력의 발언권만 높일 뿐이다. 소리의 양과 질도 나름 문명화의 척도라면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다이내믹 코리아’에 살면서 문득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그립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sang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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