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42>

  • 입력 2009년 3월 4일 13시 25분


"우리 뇌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거든요. 쉽게 풀어보자면, 음, 그러니까 그게 사라 씨 마음인 건 분명한데, 다만 그 마음이 순간적으로 찾아들었다가 사라졌다거나 혹은 그 마음이 자리 잡으려는 바로 그 때에 더 강한 다른 마음이 덮어버릴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왼발이 뽑힐 때 혹시 글라슈트를 생각하진 않았나요?"

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글쎄요. 대련에 몰두했으니까 글라슈트를 떠올리진 않은 것 같아요. 상대의 움직임을 잠시라도 놓치면 곧바로 당하기 때문에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답니다."

"조사를 해봐야 더 확실한 사실을 알겠지만, 대련 중 어려움에 처하는 순간, 사라 씨가 글라슈트를 생각한 건 아닌가 싶어요. 글라슈트라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지? 글라슈트라면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문장으로 늘어뜨리면 제법 길지만 마음에 찾아드는 건 물론 찰나겠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민선이 말꼬리를 붙들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왼발을 뽑힌 고통과 대련에서 패한 분노가 훨씬 컸을 테니까요. 이 추측을 조금 더 전개시켜보자면, 사라 씨는 질문들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글라슈트가 자신처럼 쓰러지는 걸 원치 않았을 수도 있겠죠? 난 쓰러지지만 넌 똑바로 서 있어! 이 비슷한 명령을 내렸다면……."

사라가 말허리를 잘랐다.

"제가 글라슈트에게 명령을 내렸다면 흔적이 남을 겁니다. 저와 글라슈트의 연결 프로그램을 체크하고 오셨다면서요? 그 명령을 발견하셨나요?"

민선이 치명적인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울상을 지어보였다.

"그게…… 없었습니다. 왼발을 뽑힌 직후론 깨끗하더군요."

사라가 오른 손바닥으로 검은 턱과 뺨을 감쌌다.

"글라슈트의 이상 행동을 무의식적인 명령에 복종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건 잘못이겠네요."

민선은 사라가 내린 결론을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명령이 없었다고 해서 교감을 나누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근거는 없지요."

"교감이라고요?"

"인터페이스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겠죠. 아시지 않습니까? 애완 로봇들이 자신을 애지중지 아끼는 주인의 습성을 닮는 경우가 종종 보고 되고 있습니다."

"이 일도 그럼 제 무의식을 글라슈트가 받아들였단 건가요?"

"자유의지를 지닌 로봇의 최초 출현을 믿는 것보다는 인터페이스 상의 오류나 무의식을 탐구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음부터 혹시 글라슈트가 자유의지로 판단될 만큼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 즉시 알려주세요. 사소한 부분 하나도 놓치지 말았으면 해요."

"글라슈트를 위해선가요? 아님 민선 씨 연구를 위해선가요?"

민선이 잠시 사라와 눈을 맞추었다. 빙긋 눈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일단 둘 다라고 해두죠."

사라가 더 따져 물으려는 순간 텅 빈 벽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흰 벽 전체가 스크린으로 바뀌었다. 그 속에 낯익은 사내가 헝클어진 뒷머리를 긁적이며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노트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는 사내는 글라슈트 팀장, 로봇 공학자 최볼테르였다.

"<보노보> 개국 특집 연속 좌담회예요.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군요. 핵심 안건으로 들어가면 자동으로 화면이 켜지도록 미리 입력해뒀습니다."

"최박은 글라슈트를 정비할 시간도 빠듯할 텐데 생방송까지 나가나요?"

"안건이 심각했거든요. 배틀원 자체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쪽이 패널로 참석했으니 우리도 맞대응할 수밖에 없죠."

볼테르가 갑자기 노트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점점 커졌다. 객석에서부터 자욱한 연기가 무대까지 밀고 올라왔다. 볼테르가 벌떡 일어섰다가 비틀대며 쓰러졌다.

"사라 씨! 최박이 왜 저래요?"

부엉이 빌딩이 흔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장이 먼저 쩍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고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방바닥이 내려앉기 직전, 사라는 민선의 허리를 껴안고 화면 위 볼테르를 향해 돌진했다. 사라의 강철어깨가 벽을 뚫고 허공으로 차오르는 순간 건물 전체가 무너졌다.

테러였다, 로봇 전문 채널이 개국하면 감행하겠다고 자연인 그룹에서 경고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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