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성한]징비록과 담대한 희망

  • 입력 2009년 1월 21일 02시 56분


징비록(懲毖錄)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 유성룡이 난을 가장 처절하게 겪은 사람으로서 잘못을 반성하고 훗날 또다시 닥칠지 모르는 환란을 경계하고자 당시 상황을 기술한 책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전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유성룡의 탁월한 통찰력 배워야

“선조 19년에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는데 인동(仁同) 고을을 지나다가 창 잡은 사람을 흘겨보고 조소하며 ‘너희들 가진 창의 자루가 몹시 짧구나’라고 했다. 서울에서는 예조판서가 잔치를 준비해 대접했는데, 다치바나가 자리 위에 후추를 흩어놓으니 기생과 악공이 서로 다투어 줍느라 좌석의 질서가 없어졌다. 다치바나가 숙소에 돌아와 탄식하며 통역관에게 ‘너희 나라가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일이 있고 6년 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유성룡의 메시지는 국방을 게을리 하고 사회기강을 제대로 다잡지 못할 경우 한 나라의 운명이 천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도 임진왜란에서 우리가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영의정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만을 침략한 양국 사이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려는 ‘동아 전국(東亞 全局)’의 전쟁으로 정의해 조선과 중국(명나라)이 합세해 공동의 적군을 격퇴시켰기 때문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기술한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이후 숱한 위기를 맞았고 나라를 빼앗겼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외환위기로 내몰렸다.

현재 우리는 뚜렷한 국가정체성을 바탕으로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고 국방을 튼튼히 하며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부정하는 세력이 여전히 목청을 높이고 있으며 국제공조보다 민족공조가 더 중요하고, 안보보다 자주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뿌리 깊은 실정이다. ‘통합’과 ‘변화’를 기치로 내걸고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10여 년에 걸쳐 축적된 엄청난 장애물을 제거하느라 여전히 애를 먹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기 위해선 국제정세의 정확한 판세 읽기가 필수이다.

앞으로 최소 20∼30년간은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통합’과 ‘변화’를 강조한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분열된 미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새로운 미국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질적인 것을 한데 묶는 것이 통합이라면,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변화다. 변화를 하되 무엇을 향해 변화해 갈 것인가를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을 경우 통합과 변화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유사한 국정철학을 가진 동맹국 지도자끼리 긴밀히 협력할 수 있다면 위기를 조기에 극복해 낼 수 있다. 내외적으로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정부는 긴밀한 공조체제를 바탕으로 북한 문제를 풀어나가고 지역 및 범세계적 차원에서 한미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며칠 전에 나온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보고 있노라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화되고 있는 한미동맹 관계에 대한 북한 당국의 초조감이 묻어난다. 만만하게 보였던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안보 담당자들이 북한 문제에 대한 녹록지 않은 자세를 보여준 데 대한 불안감이 배어 있다.

한미공조로 통합-변화 시너지를

우리의 국제정세 읽기와 행동하기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다.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강조한 ‘동아 전국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고, 중국과의 협의를 활성화해 북한을 비핵화와 개방으로 유도해야 한다. 우리가 한반도 미래의 운명을 개척해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에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제사회에 한국이 기여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전략적 마인드를 가지고 한미가 함께 나아갈 때 오바마 대통령이 그의 자서전에서 강조한 ‘담대한 희망’을 공유하는 동맹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김성한 객원논설위원·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ksunghan@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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