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훈]거액세금 떼먹고 무사하다면

  • 입력 2008년 12월 1일 02시 59분


예년처럼 올해도 고액 상습체납자 명단이 국세청을 통해 공개됐다. 2004년부터 시행된 고액 상습체납자 공개제도는 인권보호 문제로 논란이 된 바 있었지만 이제는 내야 할 세금을 안 내는 못된 사람이나 기업을 알리는 제도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국세청 홈페이지를 보면 이 명단의 일부 또는 전부를 잘못 사용하면 형사상 명예훼손죄로 처벌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질 수도 있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10억원 이상 체납 800명이라니

그런데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도 고액 상습체납자에 대한 이러한 민형사상 권리 보장을 보면 생각이 흔들릴 수 있다. 나는 내야 할 세금을 기쁜 마음은 아니더라도 꼬박꼬박 내는데 누군가 그것도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속적으로 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한다면 말이다.

올해 10억 원 이상 세금을 2년이 지나도록 내지 않은 사람은 800명이나 된다. 그중 개인의 경우 신규공개 고액체납자 상위 10위에 드는 사람은 최소 체납액이 170억 원을 상회한다. 이번 명단에 재공개 대상자가 빠지면서 드러나지는 않는데 과거 자료를 보면 2004년부터 4년 연속 체납 1위를 차지했던 모 인사는 체납액이 2000억 원이 넘은 적이 있었다.

체납 못지않게 나쁜 게 탈세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학원들은 차명계좌를 이용해 수강료를 받는가 하면 수강료를 현금으로만 받거나 비용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세금을 피하려 했다.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관련 자료를 폐기하는 경우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사례를 볼 때마다 국세청은 뭐하나, 고액체납자와 탈세 업체 또는 업자를 가만히 놔두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체납 발생률이나 미정리 체납액이 점차 줄어들고 국세청이 집요할 정도로 고액체납자의 은닉 재산을 추적해서 성공한 예를 보면 국세청도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격려해 주고 싶다. 문제는 명단이 공개된 고액체납자 800명 중 98.1%인 785명이 폐업자라는 점이다. 이는 명단을 공개하여 창피를 주더라도 세금을 제대로 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체납자 대책을 제대로 한 것이라 하기 어렵다.

조세채권이 생기기 전부터 납세의무자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조세채권이 생기는 경우라도 납세의무자는 세금을 부담할 재산을 아는 사람 앞으로 명의 이전하거나 현금화하여 과세관청이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시도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국세청도 금융자산 본점 일괄 조회, 이자 및 배당 소득자료 활용, 은닉재산 신고포상금제도 운영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2007년부터는 골프회원권 보유 자료를 재산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해 443억 원을 징수하는 성과를 냈다.

은닉재산 캐내 조세정의 세워야

하지만 주어진 세법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2만여 명의 국세청 공무원이 세금 안 내려고 작정한 사람들을 사후적으로 즉각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2005년 이후 미정리 체납액이 4조4000억 원에서 점차 줄어들어 3조6000억 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말 것인가?

세금은 원칙적으로 국가재정을 위해 필요한 돈을 국민에게 걷는 것이다. 내야 할 사람이 내지 않으면 누군가가 더 내야 한다. 고액 상습체납자는 자신이 낼 세금을 결국 다른 사람이 내도록 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내는 사람의 납세 의지도 꺾는다는 점에서 비난받아야 한다. 낼 수 있는데 안 내는 사람의 소득 소비 재산 등 상황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통합적으로 파악하고 체납에 맞지 않는 소비행태나 특수관계자의 재산 상황과 연계지어 은닉 재산을 꾸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세금을 안 내고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조세 분야에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박훈 서울시립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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