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日‘파라다이스 쇄국’ 치닫나

  • 입력 2008년 11월 13일 02시 59분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미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지일파(知日派)다.

그가 최근 NHK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파라다이스 쇄국’을 우려했다. “일본이 어려운 것은 피하면서 고만고만한 국가면 된다는 식의 소극성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은 좀 더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주문으로 이어졌다.

‘파라다이스 쇄국’은 2005년경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일본인이 만든 말이다. 일본이 자국의 ‘좋은 환경’에 매몰돼 국제사회에 무관심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이 말은 별다른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일본인 스스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탓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일본을 보고 있노라면 ‘파라다이스 쇄국’이란 말이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낙원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자국의 틀에 갇혀 미래 전망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달러화 가치가 치솟아 제2의 외환위기가 거론될 상황에 처한 한국의 처지에서 보면 일본은 낙원처럼 보일지 모른다. 일본은 1조 달러가 넘는 세계 2위의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다. 세계 각국의 화폐가치가 달러화에 비해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유독 엔화만은 강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 안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인구 고령화 문제가 미래를 잠식하고 있고 국가 부채는 800조 엔이 넘는다. 세금은 올릴 수밖에 없는데 경제활동인구는 줄어드는, 국가 존망과도 관계되는 본질적 위기가 목전에 와 있다.

하지만 요즘 일본 정계를 지켜보면 이런 위기 대책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게 현실이다. 총리의 잇단 중도 사퇴 이후 일본 정치는 종잡을 수 없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야당은 ‘정권교체’를 위해 중의원 해산과 총선 실시를 요구하고,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는 경제위기 대처가 중요하다며 버틴다. 그 와중에 아소 총리가 2조 엔을 전 국민에게 나눠주겠다는 경기대책을 내놓자 정치권은 지난 2주간을 급부금(給付金) 공방으로 지새웠다.

버락 오바마 정권의 출범을 바라보는 일본의 반응에서도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저팬 패싱(passing)’이다.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일본을 건너뛰어 중국을 곧장 방문한 일로 상징되는, 미국 정부에 일본이 무시당했던 쓰라린 경험이 재현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다.

국내 문제에 집착하는 일본의 이런 폐쇄성은 항공자위대 최고 수장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문을 내놓은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그런 지휘관 밑에서 훈련받는 자위관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돌이켜보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을 때도 ‘애국심과 독선’으로 뭉친 군부의 독주가 있었다. 그 신호탄은 1932년 5월 젊은 장교들이 총리관저와 경시청을 습격해 총리를 암살한 쿠데타였다.

본질적인 위기가 머지않은 곳에 와 있건만 정치권은 당파적 이해로 내부 싸움만 하고, 그 한편에서는 ‘일본 중심주의, 일본적 애국심’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린의 우려가 공감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일본의 파라다이스 쇄국은 한국인의 처지에서는 더욱 특별하게 들린다. 우선은 한국 사회도 일본과 같은 ‘우물 안 개구리’식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걱정도 생긴다. 이것이 일본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다. 한일 간 무역거래량을 고려하면 일본의 위기는 한국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기상황에서 애국심을 극한적인 형태로 표출한 일본의 역사도 한국인으로서는 개운치 않은 점이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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