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鐵面 사회

  • 입력 2008년 8월 13일 03시 01분


#지난해 일본 여행 중 겪은 에피소드 하나.

하네다(羽田) 국제공항에서 온천으로 유명한 하코네(箱根)로 가기 위해 먼저 전철을 타려 했다. 플랫폼에서 일행들과 뭘 타야 할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우리 일행 뒤로 한 사람이 섰다. 우연이려니 했는데, 금방 대여섯 명이 뒤따라 줄 서는 게 아닌가.

줄 서는 라인도 아닌데 왜 이러나 싶어서 줄 서는 라인으로 옮겨 갔더니 그 사람들이 그대로 우리를 따라왔다. 그 일본인들은 우리가 외국인이고, 줄 서는 라인도 아닌 플랫폼 중간에 서 있었지만, 먼저 온 우리를 제치고 줄을 서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로선 당황스러울 정도인 일본인의 철저한 질서의식의 밑바탕엔 ‘메이와쿠(迷惑·남에게 끼치는 폐)’를 금기시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 어릴 적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귀가 따갑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파리 특파원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프랑스 영화관에는 영화가 끝나고 다시 시작할 때 10분가량의 스크린 휴식시간이 있다. 내 뒤쪽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 돌아봤더니,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귓속말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극장이나 공공장소에서 마구 떠들고 뛰어다니는 한국 아이들(어디 아이들뿐인가)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선 남에게 방해받기 싫어하는 만큼 남을 불편하게 하거나 폐 끼치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남에게 폐 끼치면 안 된다’고 철저히 가르친다. 박물관에서 뛴다고 아이의 뺨을 때리는 부모도 보았다. ‘아이 기 죽인다’며 거의 행패 수준의 소란을 피워도 오냐오냐 하는 한국의 부모들을 생각하면….

#프랑스에도 귀경길 정체가 있다. 일요일 오후 파리로 들어가는 고속도로는 막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프랑스에 체류하는 3년 동안 구급차나 경찰차 외에 갓길을 타는 차량을 본 일이 없다.

5000명의 경찰이 깔린 가운데 500명밖에 안 되는 시위대가 갓길도 아니고, 한국의 얼굴인 광화문 대로를 점거하는 이 사회. 사실상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이 무질서는 남에게 폐가 아니라 해를 끼치더라도 내 목표는 이뤄야 한다는,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를 양산해 온 사회 병리에서 출발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면서 대통령을 욕하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개의치 않는 어른들에게서 아이들이 무얼 배울 것인가.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부실경영과 인사전횡, 편파보도 책임, 배임혐의,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에 대한 말 바꾸기 등은 차라리 접어두자. 그가 한때나마 언론인이었다면 자신의 거취 문제로 몇 개월째 나라가 시끄러운 것만으로도 사퇴를 했어야 했다. 감사원의 해임제청 요구, 검찰의 출국금지 등 갖은 오욕을 뒤집어쓰면서도 자리를 지키려 했던 그야말로 우리 사회 철면(鐵面)의 상징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국민 개개인이 권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논리로 비약시켜 도로점거 등 불법과 폭력, 방화를 합리화하는 낯 두꺼운 이들은 또 어떤가. 국민 개인이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라 무정부상태다. 따라서 다시 촛불시위에 나서려면 애꿎은 헌법 1조를 모욕하지 말고, 차라리 ‘대한민국은 무정부상태다’라고 노래를 불러라.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