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국민정서’와 외환은행

  • 입력 2008년 8월 7일 03시 01분


한국사회의 특징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국민정서’와 ‘민족주의’다. 민감한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국민정서는 법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여기에 오랜 외세의 침탈 속에서 형성된 민족주의가 기름을 부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곤 한다. 우리에게는 낯익은 광경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이다.

법 이상의 위력 발휘하는 국민정서

국민정서건 민족주의건 이것이 국내에서 우리끼리 지지고 볶고 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인의 이런 특징이 오늘날 ‘다이내믹 코리아’를 만들어낸 원동력 중 하나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무대가 국제사회로 바뀌고 상대가 외국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국 특유의 국민정서와 민족주의를 외국인이 이해할 리 없다.

최근의 광우병 파동과 촛불시위에서 이런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비과학적이고 몰이성적인 선동에 넘어간 국민정서는 미국에 대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결합해 사회를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미국으로부터 추가 양보를 따내는 추진력을 얻긴 했지만 나라는 거의 두 동강 나는 상처를 입었다.

광우병 파동뿐만이 아니다. 일반인의 관심사에서 밀려나 있지만 외환은행을 둘러싼 논란도 사실 국민정서와 민족주의를 빼놓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2003년 미국의 사모펀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여론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론스타가 4조 원 가까운 차익을 남기며 외환은행을 되팔려고 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먹튀’ 논란과 함께 당초 헐값에 팔았다는 책임론이 일면서 검찰 수사가 뒤따랐다.

현재 외환은행과 관련해서는 두 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과 헐값 매각 관련 소송이다. 이 중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서는 올해 6월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헐값 매각과 관련한 재판은 9월 말이나 10월경 1심 재판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세계 굴지의 은행인 HSBC가 지난해 12월 외환은행 인수 승인 신청을 정부에 냈지만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사는 보류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헐값 매각 관련 1심 재판이 끝나는 때를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되는 시점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헐값 매각은 우리 내부의 문제다. 투기성이 농후한 단기자금인 사모펀드에 외환은행을 매각한 것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많지만 역시 우리의 문제일 뿐이다. 관련 재판의 피고도 론스타가 아니라 당시 매각을 주도했던 국내 인사들이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매각하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셈이다. 설사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면서 제출한 서류가 불충분했고 이로 인해 인수 자체가 원인무효라 해도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되돌리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법적 불확실성이라는 말은 국민정서를 살피기 위한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는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당초 적법한 절차에 따른 외환은행 매각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6월 촛불시위에 놀라 “국민정서를 감안해 결정하겠다”고 소신을 바꾼 것이 이를 입증한다.

적법절차 따른 매각 막지말아야

재판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10월경이면 금융위가 HSBC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또다시 돌출변수가 생겨 매각작업이 차질을 빚는다면 론스타는 블록세일(대량매매) 형태로 외환은행 주식을 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HSBC에 매각할 때 받을 수 있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기해야 한다. 또 승인 지연으로 지난해 9월 계약 때보다 외환은행 주가는 20% 이상 떨어졌다. 론스타는 이 부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7월 중순 한국 정부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받을 타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오랫동안 끌어온 외환은행 건을 마무리할 때다. 사실 HSBC가 외환은행을 인수한다면 론스타의 ‘먹튀’에 배 아파할 이유도 줄어든다. 아무리 막대한 차익을 남기더라도 우리가 지불한 돈이 아니지 않은가.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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