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한국에 ‘Mr. 원’은 없는가

  • 입력 2008년 4월 14일 03시 00분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와세다대 교수가 대장성(현 재무성) 국제금융국장과 재무관으로 일한 것은 1995년 5월부터 1999년 7월까지 4년 2개월간이다. 현직을 떠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Mr. 엔’으로 부른다. 금융위기가 한국과 동남아를 휩쓴 시기에 일본 외환정책 사령탑을 맡아 국제 환(換)투기세력의 도발에 단호히 맞선 모습이 강한 인상을 남긴 덕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악성 변수가 터지면 그의 몸값은 치솟는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달러화 가치가 급락했을 때도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앞 다퉈 Mr. 엔에게 훈수를 청했다.

한국에서 ‘Mr. 원’을 찾자면 못 찾을 것도 없다.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과 국제업무정책관(차관보급)으로 재직할 때 Mr. 원으로 불렸다. 외환업무를 4년 넘게 맡았고 실적도 괜찮은 그에게 외국인 투자가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렇지만 Mr. 원의 중량감은 Mr. 엔에 크게 못 미친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일본보다 작고 원화의 국제적 위상이 엔화에 뒤지기 때문이다. 두 나라 외환정책의 수준 차가 스타 탄생과 스타 부재(不在)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고도 볼 수 있다.

Mr. 엔의 현역 시절 엔화는 달러당 70엔대 후반에서 150엔 언저리까지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탔다. 금융시장은 아우성이었지만 역대 대장상들은 여간해선 이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민감한 환율 문제는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카키바라 재무관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무기로 엔화를 연착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후임자들도 재임 시절 Mr. 엔으로 불리며 활약했다.

요즘 한국에 Mr. 원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졌다. 기획재정부 강만수 장관과 최중경 차관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환율 희망치’를 언급하고,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도 한마디씩 거든다. 재정부의 국제금융 라인은 ‘윗분’들의 환율 발언을 수습하고 해명하느라 바쁘다. 시장은 시장대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혼란스럽다. 시세가 출렁일수록 외국의 투기세력이 돈을 벌 확률은 높아진다.

강 장관은 환율이 국익에 부합해야 한다고 믿는 ‘환율 주권론자’이고 최 차관은 국제금융국장 때 군사작전식 시장 개입을 자주 해 ‘최틀러’라는 별명이 붙었다. 무리한 개입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원화 가치를 떨어뜨려(환율 상승) 수출을 늘리고 경기를 살리려는 이들의 충정엔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투기세력은 성향이 같은 두 사람의 면면을 보고 어느 쪽에 베팅할지 감을 잡기 쉬워진 것도 사실이다.

1997년 태국 밧화의 비극은 한 나라의 통화가 투기세력의 작전 대상이 되는 순간 금융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환율전쟁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외환 당국은 더 애매모호한 태도로, 때로는 속내와 다른 말을 해서라도 시장과의 두뇌게임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 외환시장에 정통한 관료를 Mr. 원으로 내세워 대외 창구를 단일화하는 게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한국의 외환정책이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알리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장관, 차관은 ‘환율’이라는 노래를 더 잘 부르는 실무 책임자에게 마이크를 넘길 줄도 알아야 한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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