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영희]‘대표로 발표’와 ‘대포로 발포’

  • 입력 2008년 4월 10일 02시 59분


주변에 보면 재치 있고 맛깔스럽게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 분위기도 띄우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니 참 부러운 재능이다. 한데 그럴 때마다 난 좀 난감할 때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센스가 없고 순발력이 없기로 소문이 난 나는 남이 하는 말을 충직하게 경청하기는 하지만 말하는 이의 저의를 간파하거나 그에 따라 적절한 답을 하는 데 젬병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스갯소리의 경우 남들은 다 허리를 잡고 웃는데 나는 끝까지 이해를 못해서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겨우 남의 부연 설명을 듣고야 알아듣기 일쑤이다. 그런데 그나마 알아들어서 그 재미있고 우스운 얘기를 집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중간에 생각이 안 나서 포기하거나 생각이 난다 해도 내가 말하면 재미가 없어져서 ‘우스갯소리’가 되지 못한다.

그런 내가 최근에 들은 우스갯소리를 감히 동아광장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한다. 내가 금방 알아들었을 만큼 쉽고 또 그만큼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얘기인즉슨 다음과 같다. 어떤 여중생이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으슥한 골목길을 걸어오면서 불량배들이 나타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걷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학생 셋이 골목 저쪽 끝에서 나타났다. “야, 일루 와!” 그중 한 명이 여중생에게 소리쳤다.

‘잘못 알아듣는 우스개’ 넘쳐

여중생은 놀라고 당혹한 나머지 “야, 일루 와!”를 “야, 날아와!”로 잘못 알아들었다. 날아오라니, 어떻게…. 하지만 무조건 그들의 말에 복종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 여학생은 책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학이 춤추듯이 양팔을 흔들며 ‘날아서’ 그 불량배들 쪽으로 갔다. 여학생이 갑자기 너울너울 춤추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불량배들은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는 이야기(조카는 이 이야기가 단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실화라고 주장했다).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 위험을 모면한 케이스다. ‘잘못 알아들은 말’을 소재로 한 우스갯소리가 또 있다. 어떤 바보 집에 칼을 든 강도가 들었다. 바보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열심히 여기저기를 뒤지는데 바보가 잠을 깼다. “강도여유?” 바보가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바보는 놀라서 “살려 주시우”라고 말했다. 바보로 정평이 나 있는 고로 강도가 말했다. “그래, 네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세 나라를 말하면 살려 주겠다.” 강도가 칼을 바보의 배에 갖다 대며 말했다. “배 째시려고 그려?” 바보가 물었다. 강도는 “뭐? 백제 신라 고구려? 맞아. 약속은 약속이니 살려 주지”라고 말하고 나서 일어나 나갔다는 이야기.

아무리 생각해도 기발한 조크다. 그런데 ‘야, 일루 와!’를 ‘야, 날아와!’로 잘못 알아들었거나 ‘배 째시려고 그려?’를 ‘백제 신라 고구려’로 알아들었다는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만으로 재미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조크의 소재가 바로 ‘위기 탈출’이라는 점은 생각해 볼 만하다. 속어, 은어, 우스갯소리가 시대상을 반영한다면 위기 모면이 절실한 시대이다 보니 아마 우리가 들어 가장 익숙한 상황이 우스갯소리에도 등장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 오해가 발생하는 일은 비단 우스갯소리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어제는 TV의 공교육 진단 프로그램에서 어떤 학부모가 ‘과학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데 내 귀에는 자꾸 ‘가학적 사고방식’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이뿐인가. 지난번에는 회식 자리에서 어떤 분이 ‘건강상의 문제’로 퇴직하게 되었다는 말을 나는 얼핏 ‘강간상의 문제로’ 퇴직한다고 잘못 알아들어서 되물어 보지도 못하고 의아해한 적이 있다.

위험사회와 연관된 세태 반영

미국에서 총기사건이 한창 발생할 때 어느 교수님은 “제가 대표로 발표할까요?”라는 학생의 말을 “제가 대포로 발포할까요?”로 잘못 알아들어 순간 가슴이 철렁한 적이 있다고 해서 웃은 적도 있다.

그런데 조금 전 방에 TV를 켜놓고 잠깐 나가 있는데 9시 뉴스 시작을 알리는 음악에 이어 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뭐? ‘실종자’ 여러분? 아니, 그럴 리가. ‘시청자 여러분’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큰일이다. 내 귀가 이상해진 건지 아니면 세태가 이상한 것인지….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