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철희]유권자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

  • 입력 2008년 3월 21일 02시 58분


요즘 한국의 정당정치에 대해 묻는 외국인들의 질문에 답이 궁색해진다. 선거가 3주밖에 안 남았는데 공천 타령이나 하고 있으면 유권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대표자를 뽑느냐고 한다. 정책과 쟁점이 없는 인물 본위 선거를 정당이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유권자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식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일본 학자들은 또 왜 다선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진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하느냐고 묻는다. 의정활동이 훌륭한 의원이라면 3선이 아니라 10선을 해도 살려야 하는 게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정치판이 무슨 도박장도 아닌데 ‘어느 정도 해먹었으면 나가라’는 식이다. 여야가 서로 개혁공천이라는 미명하에 ‘제 살 깎아내기 경쟁’을 하면서 중진의원을 솎아내면 개혁인가. 한국 국회를 초, 재선의원으로 메우려는 게 아니라면 경험 있는 정치인들을 살려야 한다.

요즘 한국 정치를 보며 묘하게도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를 떠올린다. 고이즈미는 한국에서 미운털이 박힌 정치가이지만 일본 국내 정치적으로는 정치 10단이었다. 5년 반이나 총리를 하면서 계속 50%대의 지지율을 확보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고이즈미는 일본 정치판에서 ‘괴짜’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는 자민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민당을 깨부숴 버리겠다’고 국민에게 호소하며 인기몰이를 했다. 자민당 장기정권이 인기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굿이나 보고 떡 먹으라’는 공천

기득권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하는 자민당 의원들을 ‘저항세력’이라고 불렀으며 선거 당시 ‘자객’이라는 이름의 전략공천을 하면서 힘을 모았다. 자신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개혁이 국민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며 국민을 설득해 나갔다. 고이즈미는 ‘원 프레이즈’로 불리는 간단한 수사로 알기 쉽게 방향정리를 했다. 노선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를 알기 쉬웠다. 유권자들을 납득시켜 국회를 압박해가는 정치전술에 나가타 정에 묻혀 살던 정치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두 손을 들었다. 고이즈미에게는 비판만 일삼는 야당도, 이권에 매달린 자민당 ‘족의원’들도, 안일주의만 추구한 관료들도 모두 저항세력이었다. 그런 고이즈미에게 일본의 유권자들은 지지를 보냈다.

한국의 정치권은 공천이라는 이름의 집안싸움에 숨 돌릴 틈이 없다. 자기들만의 축제요, 자기들만의 비극이다. 하지만, 국민은 여의도 논리에 함몰된 정치보다는 유권자와 함께 숨쉬는 정치에 목말라 한다. 국민을 신나게 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시원한 드라마를 유권자들은 원한다. 고이즈미의 포퓰리즘을 배우라는 건 아니지만, 국민의 관심을 모으게 했던 ‘극장형 정치’는 필요하다.

개혁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면 국민을 납득시킬 만한 원칙과 기준이 뚜렷해야 한다. 무능한 진보를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면 진보정권의 어디가 잘못됐고, 어떤 정책이 실패했으며, 국가예산의 어디를 낭비했는지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인적 청산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시스템을 개혁하고, 제도를 새로 정비하고, 법률을 바꾸고 예산을 새로 배정해야 한다. ‘성역 없는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이즈미가 그랬듯 ‘저항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몰아세워도 욕할 사람은 없다. 무슨 개혁을 하겠다는 건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국민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국민을 중심에 둔 고이즈미 정치

다가오는 총선은 지난 정권의 정책실패를 따져볼 선거이지, 현 정권의 공과를 가리기엔 너무 이르다. 국민의 편에 서서 진보정권을 새롭게 재단하겠다는 초심이 어느 정도 살아 있는지 의심스럽다. 선거의 쟁점을 제대로 잡고 개혁 대상이 누구인지 유권자들에게 판단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이념의 잣대와 원칙이 없는 실용주의는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노무현 정권이 싫어서 이명박 정권을 밀어주었지 한나라당이 예뻐서 지지한 것이 아니라는 걸 뼛속 깊이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거만하더라도 보수라는 이유만으로 국민이 지지해 줄 거라는 착각은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정치는 산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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