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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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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저소득층이 밀집한 동네에 ‘헤드 스타트(Head Start)’라는 교육기관이 자리 잡고 있다. 3세부터 5세까지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읽기, 쓰기, 말하기’를 가르치는 일종의 유치원이다. 1964년 출범한 이 기관은 가난이 왜 세습되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미국 소아과학회는 유아의 두뇌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달하는지를 집중 연구해 왔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두뇌 발달이 유전적 요인이 아닌 환경적 요인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환경적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책 읽기’가 꼽혔다.
연구팀은 생후 6개월 된 유아에게 책을 읽어주고 뇌의 변화를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 아이는 책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두뇌세포의 활동이 빨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생성됐다. 어릴 적 ‘책 읽어주기’와 ‘책 읽기’를 많이 한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벌써 두뇌의 많은 부분이 발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사회 적응이 빠르고 평균 소득이 훨씬 높다는 통계도 나왔다.
저소득층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이런 보살핌을 받기 어렵다. 그러니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현실성이 거의 없다. 어릴 적 책을 모르고 자란 아이가 ‘용’이 될 확률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가난의 세습이 유아기 때 판가름 난다는 사실이 무섭다. ‘헤드 스타트’는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국가가 일찍 개입해 저소득층에 ‘두뇌(head)’의 ‘출발선(start)’을 같게 해 주려는 것이다.
미국에는 ‘퍼스트 북’ 운동이라는 것도 있다. 저소득층 자녀에게 ‘첫 번째 책(first book)’을 무료로 보내 준다. 운동가들은 소외된 아이들에게 최대한 이른 시기에 책을 접하게 해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영국의 ‘북 스타트’ 운동은 모든 한 살짜리 아이에게 그림책 보따리를 선물한다.
국가 지도자들도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올해를 ‘전국 독서의 해’로 선포했다. 그는 선포식에서 ‘독서가 빈곤을 억제하는 효과적인 사회정책 수단’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헤드 스타트’ 사업이 이슈로 떠올랐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버락 오바마 후보는 다투어 헤드 스타트 사업의 개선 및 확대를 공약했다.
우리 사회도 독서 격차의 문제가 심각하다. 부모의 이혼 등에서 비롯된 편부모 가정이 137만 가구에 이른다. 조부모와 사는 조손(祖孫) 가정도 5만8000가구로 집계됐다. 여기에 저소득층 부부의 생계형 맞벌이가 급증하고 있다. 이들 가정에선 자녀들이 책 대신 TV나 인터넷에 매달려 시간을 보낼 소지가 크다.
어릴 적 책 읽기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출발선이 뒤처진다. 중학교에 가면 차이가 더 벌어지고 고등학교로 가면 자포자기에 이르기 쉽다. 이런 아이들에게 아무리 대학 입학의 문호를 열어줘도 실질적 도움이 안 된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책 읽기는 생존의 수단이자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다. 강진으로 유배당한 다산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우리 같은 폐족(廢族)에겐 책 읽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가르쳤다. 키케로는 ‘책이 없는 집은 창이 없는 방과 같다’고 했다. 새 정부는 이 문제야말로 실용적으로 풀어야 한다. 저소득층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단계별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답을 찾아내야 한다. 그들은 미래의 문을 간절히 찾고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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