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지금 비정규직 법을 고치자고?

  • 입력 2007년 7월 12일 19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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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20일 이른 아침 우리은행 행장실. 황영기 행장과 마호웅 노조위원장이 마주 앉았다. 마 위원장이 고뇌 끝에 행장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전 직원 임금동결, 그 재원으로 전환에 따르는 제 비용 충당’ 방안에 동의했다. 황 행장은 즉시 “1시간 뒤 노사합동 긴급 기자회견을 할 테니 준비하라”고 홍보실에 지시했다. 대외적으로 공식화해 버려야 노조 대의원대회 등에서 되돌릴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정규직이 희생을 감수한 ‘우리은행식 비정규직 해법’이었다.

보건의료 노사는 임금인상률을 작년 수준으로 유지하되, 인상분의 30%를 비정규직 해결에 사용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구체적으로는 사립대 병원은 3.5(정규직 인상)+1.8%(비정규직 해결용), 국립대는 2.5+1.5%, 민간중소병원은 3.0+1.3%를 기준으로 하되 정규직화 방식은 병원별로 결정하도록 했다.

반면, 이랜드는 회사가 비정규직을 외주업체로 내보내는 형태로 해고하려 하자 정규직 노조가 반발해 영업장 점거에 들어간 지 14일째다. 노사는 각각 근로기준법 위반, 업무방해 등으로 서로를 고발하는 등 감정이 격해져 있다.

이상은 비정규직 문제 해법에 관한 몇 가지 모델이다. 신세계, 부산은행, 현대백화점 등의 모델이 있지만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정규직 법 시행에 따른 시나리오 중 가장 염려됐던 것이 ‘비정규직 해고와 그에 대한 노조 반발’이었는데 오래전부터 노사가 삐걱거리던 이랜드가 그 길로 간 것이다.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전체 근로자의 36%나 되는 현실에서 법과 제도를 정비한 것은 당연했다. 최근 이랜드 사태가 격화되면서 “비정규직법이 잘못 만들어졌으니 고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보완할 게 있으면 보완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이랜드 사태를 법 개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이 법은 기나긴 입법과정에서도 노사정(勞使政)이 타협을 못 본 지난한 과제였다. 지금처럼 갈등이 증폭된 상황에서 법 개정을 위한 합의는 불가능에 가깝다. 평소 체력을 기르는 일은 필요하지만 급성폐렴으로 콜록대는 환자에게 운동을 권유하는 것은 옳은 처방이 아니다.

법을 개정한다고 해도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태다. 중요한 것은 법이 만능이 아니라는 점이다. 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정규직 법은 ‘열린 구조’일 수밖에 없다. 우리은행 모델로 풀 수도 있지만, 해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개별 사업장의 현실에 맞춰 노사가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하느냐가 열쇠다.

이랜드 사태는 비정규직 법이 현실에서 어떻게 뿌리내릴지, 극한대립으로 갈 경우 어떻게 정리될지를 보여 주는 시금석이다. 540만 명의 비정규직 근로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기업의 노사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경총도 뛰어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이랜드 노사는 감정적 대응을 자제해야 한다. 노동계와 사용자의 대리전으로 굳어지면 해결은 정말 힘들어진다.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지만 노동부 장관이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측이 믿을 수 있는 제3자가 사적(私的) 중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함께 먹고 자며 뒹굴 수 있는 실무 전문가가 그 일을 해야 한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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