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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4월 1일 21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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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년 뒤 그 제자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힘이 쭉 빠진 모습이었다. “아니, 무슨 일 있는가.” “예, 교수님. 이제 소신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자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검사로 부임하자마자 공무원과 지역 유지들에게 칼을 대기 시작했다. 탐관오리와 주변 토착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다. 적당히 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무시했다. 지역사회에 험담이 돌기 시작하더니 중앙에까지 원성(怨聲)이 올라갔다. 결국 좌천 인사를 당했다.
사연을 듣고 난 교수님이 제자에게 말했다. “부임할 때 소신 어쩌고 하기에 나도 편치는 않았네. 대한민국에서 소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일세. 안 그런가.” “…….”
필자의 대학 시절 강의시간에 교수님이 들려주신 일화다. 당시엔 사법시험 합격자가 극소수에 불과해 요즘의 매년 1000명에 이르는 합격자와는 엘리트 의식과 ‘소신’의 수준이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그런 시절에도 신참 검사들의 이상(理想)은 해가 갈수록 현실에 부대끼면서 빛이 바래곤 했다.
검사 중에는 공명심과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 유달리 많다. 그들은 사시 동기 중에서 눈곱만큼이라도 뒤지는 듯한 인사 발령을 받으면 견디기 어려워한다. 승진 외에도 경부선을 타느냐 호남선을 타느냐, 서울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이냐, 높은 분을 자주 모실 수 있는 지역이냐 등에 관심을 쏟는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검사가 인사 앞에만 서면 한없이 약해진다. 퇴직해도 변호사를 할 수 있다는 좋은 조건이 있는데도 소신을 꺾고 만다.
이와 관련해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의 최근 연구결과가 흥미롭다. 현직 차장검사와 부장검사 등 중견 검사 50명을 상대로 조사했더니 60%(30명)가 자신을 ‘해바라기형’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해바라기형은 ‘윗사람의 평가에 민감하고, 승진이나 출세 욕구를 숨기지 않는 성향’을 포괄한다. 다음으로 사명감과 신념에 투철한 ‘모범생형’이 26%, 청빈한 선비 같은 ‘딸깍발이형’이 6%였다. 검사들이 처음엔 모범생형이나 딸깍발이형으로 출발했다가 점차 해바라기형으로 바뀌어 간다는 추론이 나올 만하다.
어느 조직이든 상하 간의 커뮤니케이션과 호흡 맞추기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윗사람에게만 안테나를 고정시켜 놓는 해바라기형이 대세인 조직은 위험하다. 특히 정의(正義) 구현을 사명으로 하는 검찰에 해바라기형이 많다면 우리 사회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상사에게 사(邪)가 끼어 있을 경우, 부하도 적당히 불의(不義)와 타협하고 억울한 사람을 양산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검사에게 올바른 소신은 소중한 자산이고 자질이다. 검찰 조직이 검사들의 소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점이 드러나는 황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서 마음이 무겁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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