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강연 요청이 적지 않은 A 부회장은 몇 차례 이런 견해를 밝히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의 의견 수렴 과정에서 뜻을 접었다. 그를 보좌하는 임원들은 “이런 민감한 말이 보도되면 회사와 부회장께 모두 엄청난 부담이 된다”며 간곡히 만류했다.
공무원 출신인 B 사장. 공직에 있을 때 명백히 부당한 일이면 할 말을 하다가 불이익을 받자 관료 생활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민간기업으로 옮아온 뒤에 더 말조심을 한다. 기자들에게 기업 환경의 애로를 설명하다 ‘열이 받아’ 속마음을 드러냈다가 후회하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는 기업인들이 활발하게 발언한다. 기업 경영은 물론 정치사회적 흐름에 대한 ‘쓴소리’도 적지 않다. 미국의 잭 웰치 전 GE 회장이나 일본의 오쿠다 히로시 전 경단련 회장처럼 ‘무게 있는 경영자’의 말은 영향력도 크다. 그들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지진 않지만 그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비중 있는 경영자일수록 공개발언을 꺼린다. 어쩌다 인터뷰나 기자간담회를 하더라도 민감한 주제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물에 물 탄 듯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공식석상의 말만 갖고 기업인들의 속마음을 안다고 여기면 큰 착각이다.
우의제 하이닉스반도체 사장은 이달 6일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이날 동아일보에 보도된 하이닉스 임원진과 야당 의원들의 비공개 간담회 내용, 특히 ‘하이닉스 이천공장 중국 이전 검토 가능성’의 파장이 커지자 ‘불끄기’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닷새 뒤인 11일 김문수 경기지사는 본보 기자들과 만나 “정부가 구리의 유해성 문제를 이유로 이천공장 증설을 끝내 불허하면 이천공장은 존폐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는 우 사장의 말을 소개했다.
퇴임을 앞둔 그가 갑자기 기자회견까지 열어 상황을 축소하려 애쓴 이유는 뭘까. 김 지사는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한국 기업이나 기업인들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한국에서 기업인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괘씸죄로 더 큰 곤욕을 치른다”는 재계 인사들의 ‘탄식’과 맥락을 같이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경제권력이 정치권력보다 한국에서 더 위협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기업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글로벌기업의 총수들조차 여전히 청와대와 행정부에 꼼짝 못하고 엎드리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이 늘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기업 하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눈치 보면서 주눅 들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될 때 한국 사회는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다. 그날이 오면 권력과 기업 간의 관계에서 ‘권력의 책임’ 못지않게 ‘기업의 책임’도 자연스럽게 묻게 될 것이다.
권순활 경제부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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