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일본 정치인의 자기학대

  • 입력 2006년 5월 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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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호감도 세계 1위, 33개국 4만 명 조사.’

얼마 전 일본 산케이신문에 이런 제목이 큼지막하게 뽑힌 적이 있다. 순간 시선이 달력으로 향했다. ‘만우절인가?’

아니었다. 분명히 2월 19일이었다.

국수주의 성향이 강한 신문이라서 객관성 없는 조사를 뻥튀기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기사를 꼼꼼히 뜯어봤다. 일본이 세계에 좋은 영향을 줬다고 한 응답은 55%로 절반을 넘었으나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대답은 18%에 그쳤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31개국에서 긍정적 평가가 부정적 평가를 앞질렀다고 기사는 설명했다.

쉽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조사의 공정성을 의심하기도 어려웠다. 영국 BBC의 의뢰로 미국 메릴랜드대 등이 조사했다니 일부러 일본에 유리하게 조사했을 리는 없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수수께끼는 몇 주 전 토요일 풀렸다. 일본의 한 민영 TV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출연했다. ‘세계 최고-받고 싶은 수업’이라는 이름의 정보오락프로그램이었다. 농담을 섞어 가며 연예인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일본의 국제 공헌에 대한 칭찬으로 ‘강의’를 마무리했다.

그가 말한 공헌이란 일본 정부가 흔히 꼽는 공공개발원조(ODA)나 국제기구에 대한 기부금 같은 것이 아니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지난 60년간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잘살고 번영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줬습니다. 일본은 세계인의 가슴속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을 심어 줬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BBC 조사결과에 그런대로 수긍이 갔다. 일제의 잔혹함을 직접 겪지 않은 제3국 국민이 60여 년 전 ‘군국주의 일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제 발전에 전념해 온 전후(戰後) 일본의 행보가 국제사회에서 높게 평가받는 데 대해 우리가 굳이 불편해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요즘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전후 이 나라가 쌓아 온 공적을 누구보다 과소평가하는 이는 일본인들 자신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지금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국제사회가 높은 점수를 매긴 평화노선의 주춧돌을 뽑아내려 안달이 나 있다. 먼저 자민당은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을 뜯어고쳐 자위군을 갖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11월 창당 50주년 기념식장에서다. 개인의 존엄성을 기본정신으로 삼아 군국주의 교육 부활을 막아 온 교육기본법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다. ‘개인’보다 ‘애국’을 강조한 개정안이 국회에 가 있다.

침략전쟁의 주범들을 단죄한 도쿄전범재판 60주년을 맞아 일각에서는 때를 만난 듯 ‘부당한 재판’이라는 목소리를 쏟아 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 등 강경파는 “A급 전범은 일본 국내법상 범죄인이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극우파는 군국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매도한다. 정치지도자들은 말로는 과거를 반성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런 역사관에 은근히 공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A급 전범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참배할 까닭이 없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지금이라도 자학이라는 말뜻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웃나라는 제쳐두더라도 수많은 자국민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그릇된 역사를 그릇됐다고 하는 것이 자학일 수는 없다. 국제사회가 평가하는 전후 60년의 주춧돌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유물이라고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학대 아니겠는가.

천광암 도쿄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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