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추기경님이 용서하십시오

  • 입력 2005년 10월 29일 03시 06분


코멘트
김수환 추기경의 ‘나라 걱정’을 이해찬 국무총리가 ‘정치적 발언’으로 닦아세웠다. 김 추기경은 “우리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살고 있는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그런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한 이 총리의 대답은 “종교지도자인 추기경께서 정치적 발언을 하신 것 같은데 우리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는 무슨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정신’이나 ‘선출된 권력’을 들먹거릴 일도 아니다. 인간 도리와 예의의 문제다. 여든셋 고령의 추기경께서 무거운 입으로 고언(苦言)을 하셨으면 쉰셋 젊은 총리는 그 속내야 어떻든 ‘걱정을 끼쳐 드려 송구스럽다. 염려하시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해야 했다. 그것이 사람 된 도리이고 최소한의 예의다. 하물며 ‘정치적 발언’이라니. 그야말로 지난날의 은혜를 무례로 갚는 망덕(亡德)이 아닌가.

김 추기경은 1968년 4월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후 “교회는 주일만의 교회가 아닙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천주교는 신앙을 구하러 교회에 찾아오는 방식이었으나 앞으로는 사회 속으로 찾아가는 자세로 교회를 이끌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김 추기경은 그때 이미 당신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김 추기경은 유신독재로 치닫는 박정희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이 터진 뒤 김 추기경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박 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종교는 마음을 순화하고 위안을 주는 것이지 정치에 간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잠시 후 김 추기경이 답했다.

“마음이 순화되고 순수하기를 원하신다면 이 세상이 윤리 도덕적으로 향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윤리 도덕은 저 혼자 지킨다고 향상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 사회, 인간관계, 윤리 도덕에서 정치 경제를 빼놓고 그것이 과연 설 수 있느냐, 모든 것을 빼놓은 종교 윤리 도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문일석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에서)

전두환 정권에서도 김 추기경은 중요한 고비마다 ‘정치적 발언’을 피하지 않았다. 1986년 10월 20일 김 추기경은 로마에서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주장했다. 당시로는 ‘폭탄 발언’이었다. 이듬해의 4·13 호헌 조치에도 정면으로 반대했다.

김 추기경은 5공 말기에 저질러진 인권 탄압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1986년 7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성(性)고문 사건’의 권인숙 양을 위한 미사를 집전했으며, 1987년 1월 26일에는 ‘박종철 군 추도 미사’에서 전 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 도대체 있느냐, 아니면 총칼의 힘뿐이냐 하는 회의가 근본적으로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다시 국민인 우리에게 이런 정권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중대한 양심 문제를 던지고 있다.”(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에서)

이 총리를 비롯해 민주화운동 이력으로 현 정권 요직에 포진한 인물들은 거의가 ‘민주의 목자(牧者)’였던 김 추기경의 음덕(陰德)을 입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른의 쓴소리가 듣기 싫다고 ‘정치적 발언’으로 폄훼해서야 도대체 그들이 전유물(專有物)처럼 내세워 온 민주화운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인간이 인간다운 도리를 잃는다면 민주화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노 정권에서 민심이 등을 돌린 것은 단지 경제 때문만은 아니다. 서툴고 능력이 부족하면 겸손하기라도 해야 하건만 독선과 오만으로 편을 가르고, 민심을 거역(拒逆)하며, 막말과 독설(毒舌)을 쏟아내 스스로 권위와 신뢰를 잃은 탓이 더 크다.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끈다고 했습니다. 하오나 추기경님, 저들의 눈과 귀에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오니 추기경님의 큰 사랑으로 부디 저들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전진우 논설위원youngj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