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73>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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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날부터 성고성 안은 두껍게 성을 에워싼 한나라 군사들이 소리소리 질러대는 욕설로 시끄러웠다. 모두 장량과 진평이 머리를 짜내 고른 욕설이었다.

“해춘후(海春侯)는 뭐고 대사마(大司馬)는 또 뭐냐? 아무리 허울 좋은 벼슬을 씌워 놔도 낮고 하찮은 근본은 못 속인다. 기현((근,기)縣) 옥지기 조구는 나오너라.”

“주인 없는 집 지키는 개새끼가 따로 없다. 항우도 없는 성에 그 재물과 계집을 지키고 앉았으니 조구 네놈이 바로 그 개새끼다.”

“호걸이네 임협(任俠)이네, 잘도 세상을 속였구나. 싸움이 두려워 성안에 숨어 있는 게 호걸이냐? 성안 군민이 다 굶어 죽어도 저 한 목숨 부지하며 모르는 척하는 게 임협이냐?”

“힘든 싸움은 항우에게 맡기고 그 꽁무니에 숨어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게 그리 달더냐? 너도 명색이 장수라면 장수답게 나와 싸우자!”

“항우의 청지기 노릇이 젊은 날 네놈이 꾸었다던 그 푸른 꿈이요, 입만 떼면 내세우던 큰 뜻이더냐? 이미 제후(諸侯)에 올랐다면 성을 나와 제후의 위엄을 보여라!”

조구뿐만 아니라 사마흔과 동예에게도 뼈아픈 욕설들이 퍼부어졌다.

“너희가 이끄는 대로 항복했던 진나라 이졸 20만 명을 모두 산 채로 땅에 묻고 너희만 살아나니 그리도 즐겁더냐?”

“장함은 그래도 부끄러움이라도 알아 자결할 줄이라도 알았다. 여기저기 무릎 꿇어 구차한 목숨을 이어 가니 너희는 부끄러움도 모르느냐?”

“이미 우리 대왕께 한 번 꿇었던 무릎이거늘 두 번 꿇지 못할 건 또 무엇이냐? 이번에도 어서 항복해 구차한 목숨을 빌어라!”

하지만 성안의 조구와 사마흔, 동예는 잘 참아냈다. 귀에 솜이라도 막았는지 사흘이 지나도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올 기미가 없었다. 이에 한왕은 다시 계책을 바꾸었다. 다음 날로 에움을 풀고 군사를 거두기 시작했다.

취한 한군들이 흐느적거리며 진채를 거두더니, 깃발을 비뚜름하게 잡고 창칼을 끌며 동쪽으로 물러났다. 앞뒤도 없고 아래위도 없어 보이는 게 까마귀 떼가 따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터무니없는 큰소리로 성안 초나라 군사들의 부아를 돋우었다.

“시골 옥리(獄吏) 놈들 말이나 잘 듣고 기다려라. 먼저 항우부터 잡고 너희를 잡으러 오마.”

그러자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젊은 초나라 장수들이 더 참지 못하고 울근불근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조구는 잘 참아 냈다. 젊은 장수들을 엄하게 다그쳐 성문을 나가는 것을 막았다.

“모두가 적의 속임수다. 한때의 혈기에 치우쳐 큰일을 그르치지 말라. 성문을 나서는 그때로 너희는 적이 쳐둔 덫에 걸려들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구와 사마흔을 낯없게 하는 일이 곧 벌어졌다. 성 밖이 조용해지고도 한참이나 있다가 살펴보러 나갔던 군사 하나가 돌아와 말했다.

“한군은 사수(5水)를 건넜습니다. 정말로 동쪽으로 가버린 듯합니다.”

이어 멀리까지 살피러 나갔다 돌아온 군사들이 알아온 것은 더욱 조구와 사마흔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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