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의 세상속으로]위기의 주부들

  • 입력 2005년 8월 1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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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왜 이렇게 너절한 거지?’

모처럼 잡은 휴가의 마지막 날, 해피 엔딩으로 기록될 일이 하나도 없다. 행인에게 부탁해 가족사진을 찍으려 하자 디지털 카메라에는 ‘저장공간 없음’이란 글자가 뜨고, 네 살 된 딸은 열이 나고, 아이들 재우고 술잔을 기울이던 남편과는 새 차를 사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였다. TV에서 하는 ‘위기의 주부들’을 본 것은.

이미 미국에서 3000만 명의 팬을 거느리고 있다는 이 드라마는 평론가인 내가 보기에도 각본, 연기, 연출 측면에서 모두 수준급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드라마를 이끌고 있는 화자가 이미 자살한 메이 앨리스라는 여자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인 네 명의 주부의 일상이었다. 남편과 이혼한 뒤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수전, 말썽꾸러기 아이 넷에게 시달리는 전직 커리어 우먼 리네트, 끔찍하게 완벽을 추구하는 주부 브리, 원하는 것을 모두 가졌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전직 모델 가브리엘.

이 중에서 앞의 둘은 내가 이미 거쳐 왔던 상황이고, 뒤의 둘은 한 번이라도 되어 봤으면 하는 상황이잖아!

그러나 눈 씻고 보아도 네 명의 주부 중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 모두 나름대로의 ‘비밀과 거짓말 게임’을 벌이고, 이 아슬아슬한 무간 지옥에서 주부라는 역할을 고수한다.

아하. 이래서 로라 부시가 자기도 ‘위기의 주부’라고 했군. 주부라면 모두 공감할 만한 그 무엇. 불만과 의혹과 때론 배신감이 고개를 쳐들어도 내다 버리지 못하는 가정이란 테두리.

문득 남편이 드라마를 보면서 말문을 튼다. “저거 말이야‘아메리칸뷰티’랑 비슷하지 않아?” 맞다. 많은 사람이 이 드라마가 ‘섹스 앤드 시티의 주부판’이라고 하지만 내 눈엔 ‘아메리칸 뷰티’의 주제나 형식을 꼭 닮았다. 죽은 사람이 나와서 화자를 하고, 반드르르한 중산층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한 꺼풀씩 벗겨 나가는 추리 기법하며. 결국은 나도 남편에게 말을 건다.

“정말 일부일처제는 인간이 만든 가장 나쁜 제도 중의 하나야.

안 그래?”

미국가족협회에서 ‘멀쩡한 주부의 일탈을 유도해 가족의 가치를 해친다’는 비난에 시달렸다는 드라마. 그러나 과연 이 지구상에 멀쩡한 주부가 있긴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도 로라 부시와 같은 결론을 내리며 잠을 청한다. 내가 바로 위기의 주부야. 드라마가 일탈을 유도하는 게 아니라 이 드라마를 보는 것 자체가 그저 아주 조그만 일탈일 수밖에 없는. 한숨 푹…(효과음).

심영섭 임상심리학박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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