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정식]‘민족운동가’ 몽양 여운형

  • 입력 2005년 2월 28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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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반공국가’가 조선공산당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공산당의 지도층에 속했던 사람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독립장이니 애국장이니 하는 훈장을 추서한다니 말이다. 한때 ‘반공(反共)’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로 간주되었고 마르크스뿐 아니라 막스(예컨대 막스 베버)라는 이름이 든 책자만 갖고 있어도 형사들이 잡아가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는 사회·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표창하고 추서한다는 기사를 읽고 정말 놀랐다. 한총련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대한민국도 그쯤의 포용력이 있는 나라가 되었구나 하는 기분을 갖게 됐다.

그러나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몽양 여운형이 여태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몽양을 빼고 독립운동사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기 때문에 몽양의 발자취를 너무나 잘 안다. 그는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해 조선민족의 독립 염원을 세계에 선포하게 하고, 장덕수를 조선과 일본에 보내 그 소식을 전함으로써 3·1운동의 계기를 만들고, 임시정부 외무위원장을 맡아 대외선전의 주역이 되고, 1919년 말 일본 도쿄에 가 기자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는 또 1921년엔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을 논의하고, 상하이에 있는 동안 안창호와 거의 매주 연락을 취해 임시정부사업을 돕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쑨원(孫文)을 포함한 중국지도층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등 자랑스러운 일을 많이 해냈다.

정부는 그동안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좌익 계열이라는 이유로 서훈 대상에서 제외해 온 몽양 여운형 선생 등에 대해 1일 서훈한다. 1945년 광복 직후 서울 휘문학교에서 광복의 기쁨을 전하는 몽양. 동아일보 자료 사진

물론 그는 공산당에 협조하기도 했고 공산당으로부터 이용도 당했다. 1921년에는 고려공산당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운동가였다. 레닌은 그에게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民度)가 낮기 때문에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는데 몽양은 이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착취가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도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도왔지만 기독교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폭력 혁명에도 반대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7년간 전도사로 시무했던 경험과 신앙이 그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광복 후에 그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해 민주적인 자주정권을 수립하는 데에 공헌했으나 폭력배에게 구타당하고 경기 양평에서 쉬고 있는 동안 박헌영 일파가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조함으로써 그 조직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진정한 의미의 좌우합작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스탈린이 만든 남북분단의 장벽을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가 혜화동에서 암살당하던 그날, 그는 당시 미군정청 최고 간부의 초대를 받고 그의 자택으로 가고 있었다. 미군정은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고 그를 민정장관으로 모셔 남한에서의 민주주의를 과시하려 했었다. 몽양 여운형에 대한 추서는 만시지감이 있지만 다행한 일이다.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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