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성희]호주제와 한국인의 유전자

  • 입력 2005년 2월 13일 18시 04분


올해 설날에 고향에서 만난 가족 친지들 사이에서는 호주제가 단연 화제가 됐다는 소식이다.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라는 ‘사형선고’를 내렸기 때문이다.

차례상을 앞에 두고 문중 어른들 사이에서 헌재 결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조상을 뵐 면목이 없다’ ‘세상에 망조가 들었다’는 자조와 탄식이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애비도 몰라보는 호래자식들만 생겨나게 되었다’는 걱정과 한탄이 넘쳐났다고도 한다. 앞으로 명절에 고속도로에서 꼬리를 문 자동차 행렬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호주제 폐지가 가족 해체를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는 오래전부터 유림 측에 의해 제기돼 왔다. 우리의 전통적 가족제도는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다른 가족구성원이 강하게 결속돼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호주가 없어지면 가족제도가 붕괴할 것이라는 논리다. 제사를 비롯한 집안의 대소사가 모두 호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올 만도 하다.

명절은 호주제의 위력이 가시화되는 시기이다. 그런 만큼 많은 여성에게는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고통의 시기이기도 하다.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 여성들은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음식을 준비해도 차례상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한다. 이들은 평생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남편의 조상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지만 살아 계시는 자신의 부모님은 찾아뵙지도 못한다. 오죽하면 설날이나 추석은 남자에겐 명절이요, 여자에겐 노동절이란 말이 나오겠는가.

물론 최근에 이혼이나 가출 급증, 청소년 탈선, 노인 유기 등 가족 해체가 가속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호주제가 느슨해져서 생기는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요즘 가족 해체의 급증은 여성들의 사고방식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과거의 권위주의적 태도에서 탈피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직한 남편 대신 아내가 돈을 벌러 나가게 되면 부부싸움이 잦아진다.

오히려 호주제는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이는 시기에 갈등과 분열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왜 꼭 장남이 부모님을 모셔야 하느냐.”, “왜 시동생의 신용카드 대금을 우리가 갚아야 하느냐.” 명절 때 부모형제가 모일 때면 언쟁과 갈등이 표면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번 명절에 경기 파주시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해사건도 호주제의 폐해를 잘 보여준다. 이복동생 가족을 살해한 살인범은 장남이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둘째 동생이 자신보다 더 많은 땅을 상속받은 데 앙심을 품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호주제 아래서는 장남이 둘째보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호주제가 없어진다고 해서 귀성행렬이 사라지고, 명절 풍속도가 바뀌며, 나아가 가족이 해체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고향을 찾는 것은 제도에 의해 담보된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유전자에 담겨진 DNA에 따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부모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가족을 지키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호주제가 폐지되든 말든 내년 설에도, 또 그다음 설에도 엄청난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가족과 고향을 찾아갈 것이다.

정성희 교육생활팀장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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