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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1월 5일 16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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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진 시인 신달자씨(61·사진)가 펴낸 열한 번째 시집이다. ‘아버지의 빛’ 이후 5년 만에 새 시집을 펴냈는데, 그간 오래 병석에 누워 있던 남편을 잃었다.
이번 시집에는 그가 각별한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75편의 시를 모은 이번 시집의 앞부분 16편의 시를 ‘말함(言)’이 아니라 ‘침묵함’에 대해 쓰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간의 시작(詩作), 혹은 이순(耳順)을 넘은 삶 자체에 대해 커다란 회전(回轉)을 가하듯이.
“영하 20도/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단호히 얼어 무겁다/(…)/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손 얹을 때가 되었다”(‘침묵피정1’ 중에서)
시인은 3년 전 오대산 근처에서 일주일간 말 하지 않고 지내는 가톨릭 정신수련법인 ‘침묵피정’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는 “역설적이게도 침묵 수행을 통해 ‘진정한 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접근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시집은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신씨 특유의 유연하고 화려한 상상력에 힘입은 시들을 선뵌다. 그의 입속에 산다는 동물인, 악어 같은 이빨과 꽃뱀 같은 혀의 불화에 대해 쓴 ‘입’, 살면서 황급히 삼켜 버린 쓰고 떫은 것들 때문에 위(胃)에 핀 붉은 매화들에 대해 쓴 ‘내시경’, 울타리를 넘어가는 줄장미를 보면서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고픈 일탈의 꿈에 대해 쓴 ‘줄장미의 비밀’ 같은 시들이 삶의 신맛을 은유 속에 녹여낸 맛있는 작품들이다.
나이 든 여성들의 솔직한 대화 속에 번득이는 해학들을 슬쩍 인용해 본 시들은 아주 즐겁게 읽힌다. “시름시름 앓는 나를 보고/문정희 시인이/신 선생 약은 딱 하나/산 도적 같은 놈이/확 덮쳐 안아주는 일이라고 한다/그래 그것 좋지”(‘산 도적을 찾아서’ 중에서)
이번 시집에 실린 이 같은 시들의 밑바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여성성(性)이 주는 싱싱한 생명력이다. “아 저 우주의 신비를 봐/둥그런 우주를 안은 여자의 몸을 만지며/나는 조금씩 몸이 살아난다/(…)/그 성스러운 신비에 비누 거품을 문지를 때/여자가 꽃핀다/어머니가 꽃핀다/생명이 꽃핀다”(‘저 우주의 신비를 보아라’ 중에서)
이 시집 가운데 숨은 짧은 6행시 ‘그리움’은 이번 시편들에 에너지를 주는 두 번째 요인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내 몸에 마지막 피 한 방울/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휘몰아 너에게로 마구잡이로/쏟아져 흘러가는/이 난감한/생명 이동”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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