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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0월 15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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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스페인에서 로마제국의 법무관으로 일하던 젊은 시절에 알렉산더의 정복기를 읽었다. 어느 날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를 벗들이 발견했다. 놀라 이유를 묻자 그는 말했다. “알렉산더는 내 나이에 광활한 제국을 가졌지만 나는 아직 큰일을 이룬 것이 없으니 어찌 상심하지 않겠나.”
2000여년이 지난 1979년,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말했다. “알렉산더는 유럽과 아시아가 연합하는 국제 조직을 꿈꾸었던 현대적 정치가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년)이 세기와 밀레니엄마저 초월해 정치지도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그의 평전인 동시에 2300여년 동안 그의 영웅신화가 쓰이고 전파된 경로를 추적한 ‘알렉산더 수용사(受容史)’다.
그가 그리스 북부의 소국 마케도니아를 키워 동으로 인도의 갠지스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룩하는 데 들인 기간은 불과 12년. 무엇이 그를 끝없는 정복의 여정으로 몰아갔을까. 외부적인 요인은 역설적이게도 ‘평화’였다. 그가 정복한 도시들은 끊임없이 반란의 욕구로 꿈틀댔고, 알렉산더는 자신의 위용을 보여 줌으로써 권위에 복종하도록 하는 길을 택했다. 인도까지 영토를 넓힌 뒤에도 그는 “후방의 국민이 반란의 감정을 품지 못하도록 계속 진군하자”고 부하들을 설득했다.
그를 정복의 여정으로 내몬 또 하나의 동기는 호기심과 탐구정신으로 무장한 그의 내면이었다.
정복지의 인종과 풍습, 신기한 도구들을 알아보는 데 그는 유달리 열정적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의 정복지 곳곳에는 ‘잠수통을 타고 바다에 들어간 알렉산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심지어 14세기 말레이시아의 서사문학에서도 그는 잠수통을 타고 심해를 탐색하는 제왕으로 등장한다.
1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한 제국은 그가 죽은 뒤 세 조각으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여러 세기 동안 존속했다. 그의 통치를 그토록 빨리 정착시킨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복지의 행정 구조나 관습을 바꾸지 않았으며 피정복지의 관료를 그대로 등용했다. 오히려 피정복자들이 자진해서 제국의 통치체계를 수용했다. 인도의 왕 포루스가 붙잡힌 뒤 자신을 왕으로 예우해 달라고 요구하자 대왕은 포루스의 영토를 오히려 늘려 주었다. 원수였던 다리우스가 충복에게 암살되자 그는 암살범을 엄하게 처단했다.
후세가 그를 ‘읽어 내는’ 방식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그가 가장 높이 떠받들어진 시기와 장소는 17세기 프랑스였다. 루이 13세와 14세는 절대군주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알렉산더 신화’를 이용했다. 루이 14세의 한 신하는 “제국의 경계선을 지중해 동쪽까지 밀어내셔서 우리의 알렉산더가 되어 주소서”라고 읊조렸다.
국민 복지를 우선시하는 19세기가 되자 알렉산더 숭배는 프랑스에서 몰락한 반면 독일에선 환영받았다. 군소 국가들을 통합한 그의 리더십이 당시 독일인들의 통일국가 수립 욕구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전설의 성립 및 수용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책이 알렉산더의 정복과 영웅담을 읽기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까다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정복자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형상화한 책으로 이탈리아 작가 발레리오 만프레디의 소설 ‘알렉산더 대왕’(전 3권·들녘)이 나와 있다.
원제 ‘Alexandre’(2001년).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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