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74>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7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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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신이 옛적 위왕(魏王) 구(咎)를 섬기고 있을 때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진평이란 사람이 찾아와 대왕을 뵙고자 합니다.”

“위왕 밑에 있던 진평이라면 바로 얼마 전 항왕의 명으로 은왕 사마앙의 항복을 받아낸 서초(西楚)의 장수 아니오? 그런 사람이 무슨 일로 과인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오?”

들은 지 오래잖아 진평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왕이 그렇게 되물었다.

“아마도 진평이 항왕을 떠나 대왕께 의탁하러 온 것 같습니다.”

한왕의 물음에 위무지(魏無知)가 조심스레 받았다. 그래도 한왕은 전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 듣기로 진평은 전에 위왕을 섬기다 달아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항왕에게서 달아나 과인에게로 오려한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진평이 전에 위왕을 떠나게 된 까닭은 그때 제가 곁에서 보아 잘 압니다. 그것은 간특한 자들의 참소 때문이지 결코 진평에게 허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 듣기로는 이번 일도 반드시 진평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는 아닌 듯합니다. 항왕이 귀가 얇아 헐뜯는 자들의 말만 믿고 그를 죽이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달아난 것이라 들었습니다.”

위무지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간곡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실로 그랬다. 그해 정월 진평이 은왕 사마앙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패왕 항우는 그를 아끼고 믿었다.

“그것 보아라. 내 무어라 하더냐? 이번에 진평은 적어도 그 멀쑥한 허우대 값은 넉넉히 하지 않았느냐?”

객경(客卿)에 지나지 않는 진평을 장수로 세우는 데 반대하던 사람들을 돌아보며 핀잔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진평의 벼슬을 도위(都尉)로 올리면서 금 스무 일(鎰=스물 넉 냥)을 상으로 내려 그를 아끼고 믿는 정을 따로 표했다.

그런데 보름 전 사마앙이 다시 서초(西楚)를 저버리고 한왕 유방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패왕 항우는 사마앙이 처음 항복해 올 때 기뻐한 만큼이나 그 배신에 성을 냈다. 그러나 죽은 전영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발목이 잡혀 제나라에서 몸을 빼지는 못하는 바람에 당장 달려가 분을 풀 수가 없었다. 그저 길길이 뛰며 소리만 지르는데, 그 틈을 탄 간신배들이 항왕에게 속살거렸다.

“지난번에 진평은 대왕을 속였습니다. 옛날 위구(魏咎)의 패거리만 잔득 끌고 가 싸움도 않고 은왕과 그 장리(將吏)들을 꾀어 항복을 산 것입니다. 우리 서초(西楚)의 힘도 대왕의 위엄도 펼쳐 보이지 못하고 받아낸 그 항복이 어떻게 잘 지켜지기를 바라겠습니까? 과연 한왕 유방이 대군을 보내자 그들은 하루아침에 무릎을 꿇고 만 것입니다.”

그 말을 곧이들은 항왕은 더욱 화가 나 제(齊)나라만 평정하면 바로 하내(河內)로 달려가 은왕과 그 장리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 버리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 뿐만 아니라 일을 그렇게 만든 진평도 구실만 생기면 잡아다 목을 베리라 별렀다. 그런데 마침 항왕의 근신 중에 진평과 가까운 사람이 있어 그 일을 가만히 진평에게 귀띔해 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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