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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9월 17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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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 ‘러브 아다지오’라고?
마치 끔찍한 난해성의 기호들의 가장무도를 즐기는 시인 이상이 쇼팽의 ‘야상곡’ 같은 착한 제목으로 시집을 낸 것처럼 좀 낯설었다. 너무나 서정적이며 게다가 연시 풍의 제목인 까닭이다. 그러나 첫 시 ‘빨리 걷다’에서부터 서정적 주체란 그림자도 없다.
‘이제 나는 유리병, 동파이프, 고무 벌레, 붉은 벽돌, 거미줄, 안개, 비상구, 접시, 세탁소, 푸른 항구, 불난 집, 가방, 끈 떨어진 꾸러미, 자동차, 사라진 구름, 발, 발, 발, 밤, 밤, 밤.’
왜 발이 세 번 나오고 밤도 세 번 나올까? 서정적 음악성? 그저 시니피앙들의 유희? 이렇듯 그의 시적 주체는 서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서정적 대상은 어떤가?
‘아직 덜 마른 그의 몸이 마르는 소리/-그의 불행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떨어지는 소리//아직 덜 마른 짐승의 살이 마르는 소리/-아직 눅눅한 그의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떨어지는 소리’(표제 시 ‘Love Adagio’)처럼 그의 서정적 연가는 서정적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물컹물컹한 직설의 울음과 무관하며 대상과의 서정적 합일, 충만한 수렴은 아예 욕망하지도 않고 그것을 ‘마르는 소리’로 번역해 낼 만큼 건조한 하드보일드 비가(悲歌)이다.
언젠가 나는 한번 그의 시를 프로이드나 자크 라캉과 더불어 읽어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시 세계는 미메시스의 세계도 아니고 표현의 세계도 아니며 기호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시는 서정적 연시를 쓸 때조차도 일인칭 화자가 서정적 주체가 아니며 자아와 대상의 서정적 합일, 수렴을 꿈꾸지도 않으며 오히려 대상의 지시적 의미를 지우고 주체인 ‘나’의 아이덴티티까지도 함께 지워 가는 21세기적 ‘서정’의 쓸쓸하고도 황량한 내포를 연출한다.
그의 시에는 서정적 충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틈을 메울 수 없다는 그 쓸쓸한 불가능성에서 박상순의 시는 출발하기에 ‘러브 아다지오’는 연시에 대한 하나의 명백한 위반이며 역설이다.
21세기형 인간이란 ‘나’에게 초월적 본질 같은 건 없으며 세상은 하나의 기호이며 그 기호는 초월적 기의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와 대립에 의해서만 잠깐의 의미의 정박을 갖는다는 것을 수납한 별 볼일 없는, 쓸쓸한 황량한 주체인 까닭이다(시 ‘봄 비’ 중). 그 주체들이 벌이는 기호의 유희가 시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시편들을 연시로 읽기 위해서는 물컹물컹한 20세기형 서정시의 독자 말고 드라이하면서도 냉혹한, 쓸쓸하면서도 착한, 순결하면서도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문화 기호의 진지함과 상호텍스트성을 알고 있는 21세기형 새로운 독자가 필요하다는 것! 사랑의 상실과 냉혹성을 알고 있으나 그 냉혹성을 넘어선 따스함을 원하는 마니아들을 위한 사랑의 시다.
김승희 서강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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