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심훈의 ‘상록수’ 공모 당선

  • 입력 2004년 8월 12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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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마다 눈물짓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메주를 찧을 때면 그걸 한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니었습니까….”

‘민족의 상록수’ 심훈.

1919년 경성제일고보 재학시절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된 그가 어머니께 띄운 옥중서한은 ‘늘 푸른’ 청년(靑年)의 기개로 넘친다.

그는 서른다섯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항일(抗日)의 정신으로 초지일관했다. ‘조상에게서 그저 받은 뼈와 살이어늘/그것이 아까와 놈들 앞에 절하고 무릎을 꿇는’ 지식인들을 경멸했다.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해 자신을 고스란히 쓰고자 했다.

그는 작품에서 늘 해방을 기도했다.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을 간절히 염원했다. ‘역사의 명절’을 목 놓아 불렀다. ‘내 고향의 추석도 그 옛날엔 풍성했다네/비렁뱅이도 한가위엔 배를 두드렸다네….’(‘가위절’)

1930년대 들어 일제의 검열과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선친의 고향인 충남 당진에 내려가 창작에 몰두한다. 1935년 탈고한 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 현상공모에 당선되면서 그는 일약 ‘국민작가’로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농민이었고 그 아들딸이었던 시절, ‘식민지 조선의 농촌과 결혼했던’ 신여성 최용신이 그 실제모델이다.

동아일보가 전국적인 문맹퇴치운동인 ‘브나로드(v narod·민중 속으로)’ 운동을 펼쳐 조선의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이끌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다재다능한 예인(藝人)이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요 영화인이었다. 영화 ‘장한몽’의 주연배우였고 ‘먼동이 틀 때’의 감독이자 제작자였다.

그는 또 경성방송국의 아나운서였고, 동아일보의 기자였다.

동아일보와의 연(緣)은 대물림된다. 셋째 아들 심재호도 동아일보(신동아) 기자를 지냈다.

‘아버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아들’은 1970년대 ‘유신의 칼날’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하니.

그 아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을 드나들며 이산가족상봉사업에 땀을 흠뻑 쏟았다. 혈연의 끈을 이어주고자 사재를 털어 백두산 기슭까지 훑었다.

상록수의 푸르름은 대(代)를 이어가고 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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