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한국에서 지갑을 열게하라

  • 입력 2004년 8월 3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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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이 ‘나는 아르바이트로 12억 벌었다’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닥치는 대로 ‘알바’에 매달렸단다. 버는 돈은 고스란히 통장에 넣었다. 그래서 모은 돈이 1억5000만원. 이를 종자돈으로 삼아 부동산투자 등 돈벌이에 나서 12억원으로 불렸단다. 그는 지독한 자린고비 생활을 했음을 자랑스레 털어놓았다. 그의 성실성, 근검절약 정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나라 밖에서 돈쓰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이 청년 같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돈을 벌기만 하고 쓰지 않으려 한다면…. 경제가 파탄에 빠질 것이다. 예를 들어 전 국민이 불필요한 소비를 줄인다며 술을 끊는다고 생각해 보자. 술 생산업체와 주점들이 문을 닫게 된다. 수많은 종업원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일이 경제 전체로는 문제를 일으키는 셈이다. 이를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라고 한다.

요즘 식당 옷가게 택시운전사 노점상 등에게서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합성의 오류’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신문의 경제 관련 기사 대부분이 우울한 소식을 전한다. 소비는 얼어붙고, 물가는 뛰고, 국제 유가는 오르고,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치고….

소비자들은 미래가 불안하니 지갑을 닫고 있다. 짠돌이 피서 여행 탓에 대목을 기대하던 바닷가 상인들은 울상이다. 피서객이 라면을 먹는 바람에 횟집은 썰렁하고 숙박비를 아끼려는 통에 호텔과 콘도는 비고 찜질방이 붐빈다.

승용차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내구소비재도 작년보다 덜 팔린다. 생산업체엔 재고가 쌓인다. 만든 물건도 안 팔리는데 추가 생산을 위한 투자는 엄두도 못 낸다.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일자리 늘리기도 어려워진다.

국내에서는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해외로 나간 여행객의 씀씀이는 큰 듯하다. 여행객 급증으로 인천국제공항 이용객이 하루에 9만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휴가철에만 그러랴. 올 상반기에 유학 및 연수비로 해외에 지급된 돈은 10억8990만달러. 한국은행이 관련 집계를 시작한 1993년 이후 최대 규모다. 돈이 한국을 떠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어찌 돈만 흘러 나가랴. 마음도 떠나는 것은 아닐까.

올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공항에는 외국에 가는 대학교수들이 몰려들었다. 학술대회 참가자보다는 외국에 살고 있는 가족과 상봉하기 위한 ‘기러기 아빠’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 가운데 상당수는 자녀들을 조기유학 보낸다. 교수끼리 학문에 관한 대화 대신에 조기유학 자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흔하게 됐다.

한국의 엘리트 지식층인 그들은 자신도 교육자이면서 왜 자녀들을 한국에서 교육하는 것을 포기했을까. 교육서비스의 질(質)에 실망하고 한국의 앞날을 어둡게 보기 때문이리라.

우울한 경제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민생과 경제를 살리겠다고 다짐한 집권층이 입으로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기 때문은 아닌가. ‘정치기술자’들에게 경제를 맡겨 놓아서야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불안 때문은 아닐까. 경제난의 책임을 기업과 언론에 돌리는 편집증(偏執症) 성향의 권력자들을 믿고 편히 잠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으랴.

▼부유층 소비 눈총주지 말아야▼

‘합성의 오류’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민간차원에서라도 뭔가 움직여 경제를 살려야 한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적절한 소비를 하는 일이다. 남의 물건을 사 줘야 그들도 돈을 번다. 그래야 내가 만드는 물건도 팔리고 나도 먹고 산다. 버스나 지하철만 고집하지 말고 택시도 가끔 타야 택시운전사의 자녀가 학교등록금이 없어 울지 않는다. 남이 돈 쓰는 데 대해 배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 부자들에게 눈총을 주면 그들은 외국에 나가 돈을 쓴다. 이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지갑을 열게 해야 할 때다.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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