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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7월 23일 17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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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부처 노자(왼쪽부터)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작자 미상의 ‘삼교도’. 이지는 불교와 도교의 중심 되는 가르침이 유교와 동일하다는 삼교귀유(三敎歸儒)를 주장했다. -사진제공 한길사
“나이 쉰 살까지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면 나도 따라 짖어댔을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속 분서’)
탁오 이지(卓吾 李贄·1527∼1602·사진)가 살았던 16세기 중국 명나라는 그야말로 유교 교리의 그림자를 따라 짖어대기만 하는 ‘개떼’들의 시대였다. ‘신용문객잔’ 같은 무협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창’이라는 환관 특무조직이 조정대신들을 제멋대로 처단하는가 하면, 주자학적 도그마에 따라 과부의 공개 자살을 강요하는 등 암울한 혼돈의 시대였다.
이지는 원나라 때 마르코 폴로가 광동과 함께 중국 최대의 무역항으로 칭송했던 천주항 진강현의 회교도 무역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이미 할아버지 때부터 상업을 버리고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유교 경전을 두루 배웠으나 어릴 적에 이미 공자와 경서에 의문을 표시했다.

26세에 과거에 합격한 뒤 변방의 외직과 말직을 거치다가 54세 때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76세 때 어사 장문달의 탄핵을 받고 감옥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찔러 삶을 마칠 때까지 수많은 저술을 남기며 학문의 길을 걸었다.
그는 ‘모순과 갈등의 철학자’다. 맏아들이란 책임감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고, 부친상을 치르던 중에도 왜구를 막는 일에 참여하며, 2남2녀의 자식이 굶어 죽는데도 청렴한 관리로 살았다.
반면 절간에서 공무를 보다 고승들과 토론하기도 하고, 말년에 출가해 삭발하면서도 공자상과 불상을 함께 모셨다. 과부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제자학 불교 도교뿐만 아니라 서학까지 섭렵한 지적 방탕아이기도 했다.
이지는 유교, 제자학, 불교 등 중국 사상사의 전 영역뿐만 아니라 ‘서유기’ ‘서상기’ 같은 소설과 희곡에 이르기까지 100여종에 이르는 백과전서적 저술을 남기고 있다.
‘태워버려야 할 책’이란 이름을 가진 대표작인 ‘분서’는 그의 표현대로 “마음 맞는 벗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 형식의 글이다. 그는 스스로 쓴 서문에서 “근래 학자들의 병폐에 깊숙이 파고들어 그들의 고질병을 까발리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태우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책은 편지글을 모아놓은 ‘서답’, 논설을 모은 ‘잡술’, 역사비평문을 수집한 ‘독사’, 시문류를 취합한 ‘시가’로 구성돼 있다. 특히 ‘참된 마음인 동심(童心)’을 다룬 ‘동심설’, ‘하나가 아닌 평등한 둘’의 사상을 담은 ‘부부론’ 등에서는 대담한 자기고백과 위선에 대한 그의 폭로정신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김혜경 교수의 2004년 판 완역본 ‘분서’는 감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중일(中日)의 수많은 학자들이 이지를 다루면서도 단 한 권의 완역본이 없는 상황에서 10년간의 성실한 사투(死鬪)가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1700개의 역자 주로 빼곡히 수놓은 한글 완역본 ‘분서’는 번역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미덕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이제 극명하게 엇갈리는 이지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고, 그의 육성을 먼저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유동환 한신대 겸임교수·동양철학 phils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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