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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21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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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나 카뮈보다 앞서 소설과 실존철학을 융합하는 획기적 시도로 20세기 문학의 새 지평을 연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1904∼1969).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다. 망명했다는 이유로 생전에 조국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이 불운한 천재를 기리기 위해 폴란드에선 올해를 ‘곰브로비치의 해’로 정하고, 커다란 기념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폴란드 동부도시 루블린에서 열리게 될 ‘곰브로비치 연극제’(10월 6∼10일)를 비롯해 학술대회 전시회 도서전 사진전 등이 잇달아 기획돼 있다.
폴란드 ‘모더니즘 3대 거장’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부친의 권유로 법학을 전공하고, 파리에서 경제학 철학을 공부했으나 문학을 향한 애틋한 꿈을 접지 못했다. 1933년에 자비로 낸 단편집 ‘성장기의 회고록’으로 작가의 길 위에 선 이래 ‘페르디두르케’(1933) ‘대서양 횡단’(1957) ‘포르노그라피아’(1960) ‘코스모스’(1965) 등의 장편과 ‘일기’(1957, 1962, 1966)를 비롯해 희곡 에세이집 등을 냈다.
그는 여행지인 아르헨티나에서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소식을 듣고 망명을 결심해 이후 영원히 외국을 돌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들은 사회주의 폴란드에서 30여년간 출판 금지됐지만 외국에선 ‘실존주의 문학의 원조’로 추앙받았다. ‘페르디두르케’의 경우 작가의 손에 의해 스페인어판이 나온 후 30개 국어로 옮겨졌다.
그는 “예술가의 역할은 철학을 아름다운 매혹 속에 마법처럼 빠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이 같은 예술관이 고스란히 투영된 산물이다.
주인공인 서른 살의 작가 유조 코발스키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정신은 그대로지만 육체는 열일곱 살 소년이 돼 버렸음을 알게 된다. 소설은 어른의 사고력을 갖춘 그가 겉모습 때문에 어린애 취급을 당하면서 겪는 좌충우돌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작가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스스로 자신이 될 수 없으며,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다. 우리는 자기에 대한 주위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고, 기대의 틀에 자기를 맞춘다. 결국 가면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코발스키는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쓴 가면과 내면의 자아 사이에 생겨난 불균형에 맹렬하게 저항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로테스크와 난센스, 패러디 기법과 유머를 적절히 반죽해 가벼움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실존에 관한 절실한 물음을 담은 철학소설이다. 작가는 말한다. 관습이나 문화라는 이름의 타인에 의해 형상화되고 구속되는 게 우리 운명이라고. 우리 모두는 그 ‘형식의 굴레’에서 도망칠 수 없노라고.
우리는 가면을 썼으면서도 진정한 소통을 갈망하며 바깥으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엉뚱하고 발칙하며, 대담하고 우스꽝스러운 코발스키의 모험담이 세기(世紀)를 넘어서까지 독자들을 매혹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성은 한국외국어대 동유럽발칸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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